"저우언라이가 돌아왔다" 중국 추모 열기

2014-01-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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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중국 전 총리 / 이하 사진=소후닷컴] '6무(六無)', 여섯 가지가 없는 사

[저우언라이 중국 전 총리 / 이하 사진=소후닷컴]

'6무(六無)', 여섯 가지가 없는 사람

공과 사를 구분하는 엄격한 공직자, 사망할 때 남긴 돈은 단 5천 위안뿐인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이자 혁명가.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1898~1976) 전 중국 총리의 사망 38주기를 맞아 대륙이 온통 추모 열기로 가득하다고 소후닷컴이 8일 보도했다.

중국인들에게 그는 흔히 '여섯 가지가 없는 사람', 6무(六無)로 통한다.

첫째, 주은래 총리는 사망 후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사불유회(死不留灰)다. 둘째, 살아서 후손을 두지 않았다. 생이무후(生而無後)다. 셋째,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관이부현(官而不顯)이다. 넷째, 당을 조직했어도 사조직은 꾸리지 않았다. 당이불사(黨而不私)다. 다섯째,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다. 노이무원(勞而無怨)이다.여섯째,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아 정치풍파를 막았다. 사불유언(死不留言)이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소후닷컴 기사 표제사진. 8일, 저우언라이 전 총리 사망 38주기를 맞아 그를 닮아 유명해진 배우 장장산(張江山) 씨가 생시에 저우언라이와 같은 복장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그 날, 유엔 깃발은 반기로 올랐다"

중국에는 광장이나 곳곳에 모택동(毛澤東)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기념관 숫자만 놓고 보면 마오쩌둥보다 저우언라이 것이 훨씬 더 많다. 욕심이 없었다는 그를 문화대혁명의 칼바람조차 피해갔다. 너무나 약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후대 사학자들은 말했다.

그는 중요한 손님과 만찬이 있을 때는 먼저 주방을 찾아가 국수 한 그릇을 말아 먹은 후 손님 자리에 나갔다. 자신의 배가 고프면 손님 챙기는 일에 소홀할까봐서였다.

그는 1976년 1월 8일 사망했다. 이 날 군 총사령관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던 주더(朱德)는 하던 회의를 멈춘 채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저우언라이의 업적을 아느냐?" 그리고 이 말에 이어 총사령관은 30여분에 걸쳐 저우언라이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고 전한다.

이 날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앞에는 유엔기가 반기로 게양됐다. 세계 어느 나라 원수가 사망했을 때에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 사건은 즉시 몇몇 국가로부터 반발을 불렀다. 이 때 발트하임 사무총장은 "그건 내가 단독으로 결정한 일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1954년 제네바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 이 회의에서 세계인들은 단연 그의 외모에 반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중국에서는 드문 프랑스 유학파인 그를 마치 헐리우드 배우처럼 묘사하면서 풍모를 찬탄했다.]

"요하 동쪽은 동이족 땅이야!"

한편 그는 철저한 양심가이며, 한민족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정치가였다. 항일 독립운동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깊었던 그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국인들은 현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준 청나라의 만주족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요하 동쪽은 본래 동이족(한민족)들의 땅이다. 지나친 국수주의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요즘 동북공정 등으로 우리 인식에 새겨진 중국인들에 대한 인상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다. 그는 평소 만주족을 동이족의 일파로 여겼다고 한다.

[8일, 베이징 시내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인 저우 모씨가 자신이 소장한 저우언라이 기념품들을 공개했다. 그는 이제까지 기념사진 1만3천여 점, 서적 1천여 권, 신문 1천여 부를 모았다. 단지 저우 씨는 1973년 어느 날 저우언라이 총리를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며, 그 때의 깊은 매력에 빠져 저우 총리 기념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중신넷이 8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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