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510주년' 신사임당에 대한 사실 16개

2014-10-2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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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지 510주년되는 해다. 음력 10월 29일생

올해는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지 510주년되는 해다. 음력 10월 29일생으로서, 양력으로 따지면 1504년 12월 5일생이다. 신사임당에 대한 이모저모를 정리해봤다.

1. 신사임당은 딸부잣집 5자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인선. 오늘날 태어났으면 신인선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사임당은 당호)

[www.vav.kr]

2. 뼈대깊은 양반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아버지 신명화는 몇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41세에야 겨우 진사가 됐다. 처가에서 과거 시험 뒷바라지까지 해준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가 잘 안 나와서, 장인어른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신명화는 아예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에 내려와 살았다.

[신사임당이 자란 강릉 오죽헌. 아들 이이도 이곳에서 낳았다 ]

3.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문학적·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 신명화는 이 둘째 딸을 많이 아꼈다.

4. 사임당이 19세 때 가난한 양반집 이원수라는 총각과 혼사를 맺게 했다. 사윗감을 잘못 고른 거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는데, 사실 신명화의 속뜻은 사임당의 예술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집안을 고른 것이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환경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재능을 묻어야 했다.

5. 이원수와 사임당의 금술은 좋았을까? 그런 것 같진 않다. 이원수는 사임당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 이원수는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거듭했고, 사임당은 이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다.

6. 이원수가 사랑했던 여인은, 큰 아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인 권씨였다. 자유분방하고 약간 조울증 기질이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권씨를 몹시 싫어했고, 남편이 권씨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이원수는 사임당이 죽자, 권씨와 결혼했다.

[강릉 경포대에 세워져 있는 신사임당 동상]

7. 이원수도 과거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답답했던 신사임당은 10년 별거를 맹세하고 이원수에게 산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원수는 되돌아왔고,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만에 과거 시험을 포기했다.

8. 사임당은 자기가 죽어서도 재혼하지 말 것을 남편에게 청하지만, 이원수는 이런 경우도 있다, 저런 경우도 있다는 식으로 맹맹하게 답한다. 그 대화가 동계만록에 적혀 있다.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 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9. 사임당은 5남 3녀를 낳았다. 율곡 이이는 세번째 아들로서, 사임당이 33세 때 출산했다.

10. 이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우며 큰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를 존경했고 깊이 따랐다. 이이 뿐 아니라, 다른 아들들 모두 어머니를 많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1. 이이는 어머니의 총명함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신사임당이 죽고 권씨가 계모로 오자,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 이이의 정적들은 나중에 '중이 됐다가 환속했던 놈'이라고 두고두고 조롱했다.

12. 아래는 신사임당의 그림 '조충도'다.

13. 당대 사람들은 사임당을 '뛰어난 여류 화가'로 바라봤다. 사임당에 유교적 '현모양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조선 후기 송시열의 공이 컸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가 된 '율곡 이이'를 칭송하는 과정에서 사임당을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송시열은 신사임당 난초 그림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만약 이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신사임당이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현모양처의 상징, 한국 여성의 표상이 된 데에는 여러 정치적 동기들이 깔려 있었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이 후보에 오르자, 반대가 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 자녀들은 어머니를 닮아서 문예 방면에 다 재능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장녀 이매창도 어머니를 닮아 시와 그림에 능해, '작은 사임당'이라 불렸다.

15. 사임당은 '시월드'에 있으면서도, 친정 엄마를 많이 그리워했다. 본인 건강이 안 좋아지고 또 남편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 어머니를 더욱 애타게 찾았다고 하다. 아래는 1537년 친정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지은 시라고 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16. 사임당은 47세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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