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어떻게 생각하나?” 면접관이 물었다

2014-12-12 17:59

add remove print link

“성희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을 농담으로 받아칠

“성희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을 농담으로 받아칠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 채용 면접을 가정한 질문과 모범답안이다. 성희롱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답이라는 말이다. 놀랍게도 이 모범답안을 작성한 곳이 고용노동부다.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일자리 정보 사이트 ‘워크넷’에 게재됐던 ‘면접 가이드’의 일부다. 논란이 일자 지난 달 14일 이 자료는 ‘워크넷’에서 사라졌다.

성희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을 보자.

[동영상=Youtube “미생 5국: 직장 내 성차별 및 성희롱”by st te 중 2분 10초~3분36초 구간]

과연 가벼운 성적 농담은 회사 분위기를 밝게 하는 좋은 일일까? 성희롱은 가슴 파인 옷을 입은 여성의 잘못일까?

가슴 파인 옷 입은 여성이 잘못?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희롱’에 대한 법적 정의가 이뤄진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이른바 ‘서울대 신교수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신모 교수는 여성 조교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는 혐의로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MBC뉴스 - news.mbc.co.kr

피해자였던 여성 조교는 무려 7년 동안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일념으로 싸운 결과 마침내 ‘성희롱’이 법적 제재 대상으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성희롱’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성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 등을 주고, 이를 거부할 때 고용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

법적 판결이 일터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 데엔 시간이 필요하다. 신 교수 판결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 후 관련 법들이 정비되고,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성희롱 사건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서울대 신 교수 사건 직후의 TV뉴스를 보자.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서 백지연 앵커는 “지금도 성희롱 문제를 흥밋거리 정도로만 여기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짚고 있다. 한 시민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감추어지고 잠복될 수 있는 문제들이 갑자기 수면 위로 불거지면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가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

뉴스데스크 | MBC뉴스

1.jpg

[20년 전 아나운서의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 / MBC 뉴스 화면 캡처]

남성에 대한 성희롱 처벌 이어 회사 차원의 책임까지

그로부터 5년 후인 1999년 1월 6일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별 신경 쓰지 않고 오가던 성 차별적 언행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마련된 셈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던 성희롱 사건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었던 사건이 있었다. 여성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 아니라 남성 직원을 성희롱한 여성 직원에 대해 첫 배상 판결이 났다.

이 사건은 성희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한 단계 높히는 계기가 됐다. 직장 내 성희롱은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뉴스데스크 | MBC뉴스

[“남자건 여자건 성적인 모욕감을 느꼈다면 당연히 배상을 받아야 한다” / MBC 뉴스 화면 캡처]

그 후 개인이 아닌 회사에 성희롱 책임을 묻는 판례가 나왔다. 2002년 11월의 일이다. 40여명의 부하 여직원들에게 상습적으로 음담패설을 해온 롯데호텔 임원들이 고소됨에 따라, 회사 차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결이다. 회사가 직장 내 성희롱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법적 요구였다.

2002년 ‘직장성희롱 회사도 책임’ 판결

마침내 200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됐다. 여자 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직장 생활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사회적 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성희롱은 약자에 대한 폭력”

그럼에도 크고 작은 성희롱 사건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대 수리과학부 강모 교수의 인턴 학생 성추행 사건이 불거졌다. 무려 22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줄줄이 나타나 큰 파문이 일었다. 이 사건이 마무리 되기도 전인 지난 3일 고려대에서도 교수 성추행 사건이 터져나왔다.

더욱이 가해자가 제출한 사표를 대학 당국이 수리하면서 더이상 문제삼기가 어려운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된 탓에 이 사건들은 더 큰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현혜 교수는 “성희롱을 친밀감의 표현으로 보는 건 가해자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다”고 지적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배려하는 것이 성희롱 예방의 핵심이다. 성희롱은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한 폭력행위”라고 잘라 말한다. 성희롱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이다.

직장 내 성희롱이 확인되었는데도 행위자에게 징계나 조치를 하지 않으면 그 회사나 기관에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회사나 기관에서 성희롱 예방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은 문제 해결의 완전한 책임자가 아니다. 이 교수의 말처럼, 존중과 배려의 직장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 이것이 모두가 행복한 직장 생활의 시작이다.

GE_basic.jpg

※ 이 글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지원으로 기획된 연재물 ‘미디어와 성’의 네 번째 스토리입니다.

(제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로 연결됩니다)

① “그의 완벽한 몸이 날 괴롭힌다”

② “성희롱, 어떻게 생각하나?” 면접관이 물었다

③ “여자애처럼 달려보세요”

④ “이 옷은 YES를 뜻하는 게 아니다”

⑤ “제대로 된 야동을 보고 싶다”

home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