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우체통, "1년 전 추억을 배달합니다"

2015-10-1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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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월애' 공식 스틸컷 배우 전지현(왕지현·33) 씨와 이정재(42) 씨가 출연한 영

영화 '시월애' 공식 스틸컷

배우 전지현(왕지현·33) 씨와 이정재(42) 씨가 출연한 영화 '시월애'에는 2년을 뛰어 넘어 편지를 전달하는 우체통이 등장한다. 이 우체통을 매개로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살고 있는 이정재, 전지현 씨는 인연을 맺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오늘날에도 이처럼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편지를 전달해주는 우체통이 있어 화제다. 바로 '느린 우체통'이다. 편지지에 사연을 적어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 해당 주소로 배달된다. 이는 이용자가 "6개월 후, 1년 후 보내달라"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해당 지역 '느린 우체통' 규칙에 따라 적용되고 있다. 예로 명동 우표박물관과 인천 영종대교 휴게소 '느린 우체통'은 1년 후에, 경북 포항시는 6개월 후 편지를 배달한다.

느린 우체통은 우체국과는 별개로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2009년 5월 인천 영종대교 휴게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로 확산됐으며 현재도 점차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인천 영종대교 휴게소 '느린우체통' 관계자는 "특정 단체에 소속돼 운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 운영 현황을 알긴 어려우나 다양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명동 우표박물관에 있는 ‘느린 우체통’을 체험해봤다. 명동 '느린 우체통'은 공공기관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소속 우표박물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명동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우표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이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로 매주 월요일 휴무라고 하니 이용에 참고하도록 하자.

이하 위키트리

10일 오전에 방문해 한적했다. 입장하니 저 멀리서 편지를 쓰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오전에 방문한 우표박물관은 다소 한적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는 아이들에게 눈길이 갔다. 아이들은 "1년 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1년 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하 동의 하 촬영)

회색 커플 티를 입고 편지를 쓰고 있는 남녀도 보였다. 자신들을 부산에서 온 커플이라고 소개한 김호재, 진태연 씨는 "200일 정도 됐고,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 여행에 앞서 인터넷 검색으로 느린 우체통을 알게 됐다"고 했다.

부산에서 온 '김호재·진태연' 커플이 1년 후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한 가족이 일렬로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동욱 씨는 “아내와 딸과 함께 이곳을 처음 찾았다”고 했다. 또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에 적고 있다. 1년 후 받게 되면 의미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동욱 씨 가족이 일렬로 앉아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느린 우체통을 여러 번 이용한 단골 고객도 있었다. 친구들과 처음 이곳을 찾았다는 한지은 양은 "1년 전 서로에게 보낸 편지를 1년 후에 받으니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엔 1년 후 나에게 보낼 편지를 쓰러 왔다"고 말했다.

이용자들 사연을 듣고자 박물관 내부를 거닐다 '느린 우체통'을 발견했다. '느린 우체통'은 이동욱 씨 가족 뒤편에 자리해 있었다.

명동 우표박물관에 있는 '느린 우체통'이다.

다양한 이용자들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 실제 느린 우체통을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이에 따라 기자도 1년 후 나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우체통 옆에 간단한 설명서가 적혀 있었다. 뮤지엄샵에서 300원을 내고 우표를 구입하면 편지지와 편지봉투도 함께 받을 수 있다. 다 쓴 편지지는 편지봉투에 넣어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완료된다.

느린 우체통 이용방법이 적혀 있다.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후 느린 우체통에 넣었다.

1년 전 자신에게, 혹 가족, 친구, 연인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1년 전 그날을 추억하는 것은 물론 현재를 더 보람차게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많은 사용자를 만나고 직접 체험하면서,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이에 따라 명동 ‘느린 우체통’을 운영하고 있는 우표박물관 담당자 문준 씨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 안녕하세요. 명동 '느린 우체통'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합니다. 명동 우표박물관에 있는 '느린 우체통'은 2012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빠르게만 진행되는 우리 삶을 잠시나마 돌아볼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자는 의도에서 기획됐습니다. 1년 뒤 배송은 받는 사람에게 행복한 기다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현재 각지에서 '느린 우체통'이 운영된다고 들었는데요.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요?다른 기관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표박물관에 있는 '느린 우체통'의 경우 편지를 월별로 분류해 직접 발송하고 있습니다. 느린 우체통과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들을 모두 조사하진 않았지만 대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주로 어떤 이용자들이 방문하고 있나요?보통 하루에 이용하는 고객은 평균 20명, 많게는 30명 정도 됩니다. 주로 친구·가족·연인들이 방문하는 편이고, 연말과 여름·겨울방학 때 이용 고객이 많습니다. -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종종 헤어진 연인들이 연락해서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데요. 한 달간 모아서 발송하는 편지 양이 만만치 않아 그런 부탁을 받을 때 약간 난감합니다. 그분들 처지를 생각하면 부탁을 안 들어주기도 어려워 편지를 일일이 체크해 빼는 수고로움을 거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1년 뒤 편지는 가족이나 나에게 쓰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

메신저, SNS 등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시기지만, 가끔은 손편지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동안 빠른 속도로 주고받는 디지털 메시지에 지쳤다면 오늘은 아날로그에 젖어보는 것은 어떨까. 1년 후 자신이 혹은 지인이 어떤 삶을 살고 있을 지, 상상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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