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진짜 헤어질까?' 시민에게 직접 물어봤다

2016-05-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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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정말 헤어질까?

덕수궁 돌담길 / 위키트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꼽히는 덕수궁 돌담길,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 덕분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제격이다.

그런데 연인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다. 바로 '연인이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다.

정말 연인이 함께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될까? 도대체 이 속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의 퇴위 전까지는 '경운궁'으로 불렸다. 아관파천 사건(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일본군을 피해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이후 고종이 경운궁을 거처로 선택하면서 크게 확장됐다. 돌담길 역시 경운궁의 확장과 함께 길어지고 넓어졌다. 당시에는 경운궁 돌담길이었던 셈이다.

이 경운궁 안에는 왕의 승은을 입지 못한 후궁들이 모여살던 처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처소로 인해 죽은 후궁들의 한이 남아 연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미신이 생긴 것이 '돌담길 속설'의 최초인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경운궁의 쇠락과 더불어 돌담길도 축소됐다. 이때 덕수궁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영성문 고갯길'이 생겼다. 그리고 비로소 '돌담장'도 쌓아올려 지금의 운치 있는 모습이 됐다.

영성문 고갯길은 당시 '사랑의 언덕길'로 불렸다. 길의 양옆에 돌담이 세워져 있어 나름대로 비밀스러운 공간이 연출됐다고 한다. 1950년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는 당시 돌담길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 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싸여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 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 데다가, 좌우편 담 안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턴넬(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경성과 인천》 (1929)에 수록된 미국영사관 앞 거리 / 한국콘텐츠진흥원

이렇게 한때 사랑의 길이었던 덕수궁 돌담길은 현대에 들어서 다시 '헤어짐의 길'로 정의됐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던 대법원과 서울가정법원 때문이다.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부부가 함께 돌담길을 걸어야 했을 테니,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좀 씁쓸한 얘기다.

한때 서울가정법원이 들어서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 / 이하 위키트리

그렇다면 궁 안에 사는 궁녀도, 법원도 없는 지금은? 함께 손을 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던 커플에게 직접 물어봤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 김은미(24) 씨는 "남자친구와 자주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복잡한 서울시내와 달리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또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속설에 대해서는 "남자친구와 만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연애 초기 때부터 데이트 장소로 돌담길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건재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위치한 식당 직원 이윤탁(28) 씨는 "주말에는 특히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나도 휴무일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걷곤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위치한 회사를 다니는 박소정(27) 씨는 "퇴근 후에 남자친구를 만나 돌담길을 걷다가 돌담길에 얽힌 속설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 후로도 다투는 일 없이 사이가 좋다"고 전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는 연인의 모습

반면에 속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회 초년생인 이예나(26) 씨는 "아직 남자친구는 없지만, 생긴다면 함께 돌담길을 걷고 싶진 않다. 혹시 모르니까"라고 얘기했다.

김명진(30) 씨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함께 돌담길을 걸은 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그 후로는 여자친구를 만날 때 데이트 장소로 돌담길은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십수 년째 경복궁을 지키고 있다는 관리인 박모(56) 씨는 "그런 속설은 믿지 않는다. 나는 돌담길에서 거의 산 것과 마찬가지인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시집 장가도 다 보냈다. 내가 그 속설이 맞지 않는다는 살아있는 반증이다"라고 강조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다소 서글픈 속설을 품어 왔던 덕수궁 돌담길, 그 내막이야 어찌 됐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기쁨과 휴식을 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엄연한 사랑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질 날을 기대해 본다.

덕수궁 돌담길의 아름다운 전경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