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목숨 바친 역사 속 인물 7명

2016-05-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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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감정이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산다".

사랑,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감정이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산다". 흘러간 유행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가사다. 사랑 없는 세상은 암흑이고, 부족한 세상은 잿빛이다. 사랑은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최후의 보루다. 

사랑은 하지만 위험하다. 태풍처럼 모든 걸 단숨에 집어삼킨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에게 흔히 "눈이 멀었다"고 표현한다. 이성적 판단을 힘들게 하고, 때때로 무모한 행동까지 부른다. 사랑에 빠지면 '겁'이라는 게 사라지는 걸까.  

미국의 여류 소설가 펄 벅(Buck·1892~1973)은 "사랑은 성장이 멈출 때만 죽는다"고 했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몇몇 사람들은 사랑을 이유로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는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친 역사 속 인물 7명을 소개한다. 

1. 알렉산드르 푸시킨(Pushkin·1799~1837) 

이하 Wikipedia

 

제정 러시아의 소설가·시인이다. "아내가 '당테스'라는 프랑스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편지에 격노해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하지만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며칠 뒤 사망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2. 윤심덕(1897~1926) 

 

일제 강점기 중반 성악가 겸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대표곡으로 '사(死)의 찬미'가 있다. 극작가 김우진(1897~1926)과 연인 사이로 유명하다. 당대의 절망적 현실에 못 이겨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지금의 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 시신은 둘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 

투신 당시 윤심덕과 김우진은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밀회 뒤,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3. 낙랑공주(?~32)

한사군(漢四郡, 중국 한나라가 직할 통치한 한반도 지역 4곳) 가운데 하나인 '낙랑' 태수(지금의 시장) 최리의 딸이다. 

고구려 왕자 '호동'과 사랑에 빠져,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할 당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북 '자명고'를 찢었다. 낙랑공주의 도움으로 고구려는 무사히 낙랑을 함락했다. 최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낙랑공주를 죽였다. 

4. 강명화(1900~1923)

조선의 기생. 지역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 차이에 가로막혀 결혼이 좌절됐다. 이에 강명화는 충남 아산시 온양으로 떠나 거기서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 장병천도 4개월 후 강명화를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 잔 에뷔테른(Hébuterne·1898~1920)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Modigliani·1884~1920)의 마지막 연인이다. 잔과 아메데오는 1917년 처음 만나 아메데오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함께했다. 잔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아메데오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를 따랐다. 

아메데오가 사망할 당시 잔의 뱃속에는 8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잔은 아메데오가 세상을 떠난 지 이틀 뒤, 투신자살으로 생을 마감했다. 

6. 에바리스트 갈루아(Galois·1811~1832)

 

프랑스 수학자. 대수학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스테파니펠리시(Stephanie-Feliece)라는 여성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의 연인이자 명사수 테르벵빌과 결투를 받아들인다.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갈루아는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뒀다. 일설에 따르면, 갈루아는 파리 남부 공동묘지에 '개'처럼 묻혔다고 한다. 현재 갈루아의 묘는 찾을 수 없다. 

7. 홍윤애(?~1781)

조선 후기 인물로, 제주 사람이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1752~1800) 시해 음모에 연루돼 제주로 귀향을 간 조정철(1751~1831)을 만나 그의 아이까지 낳았다. 

1781년, 홍윤애는 제주 목사로 부임한 김시구(1724~1795)에게 "조정철의 비행(범죄)을 말하라"며 곤장형을 당하나, 끝내 답변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김시구와 조정철은 시해 미수 사건 이후로 악연이 된 사이였다.

이후 20여 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친 조정철은 1811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뒤, 홍윤애를 기려 '홍의녀지묘'라는 비를 세웠다. 

조정철과 홍윤애는 1997년, 조정철이 있는 경북 함창군 사당에 함께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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