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도 대신" 대필 작가 임재균 씨 인터뷰

2016-06-3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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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적는 '대필 작가'다. 의뢰

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적는 '대필 작가'다. 의뢰인이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의뢰인 대신 세련된 글로 써준다.

영화 '그녀(Her)' 스틸컷

임재균(36)씨는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대두할 미래사회에서도 살아남을 직업으로 '대필 작가'를 꼽는다. 임 씨는 8년 차 대필 작가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아르바이트로 대필을 시작했죠. 첫 직장이 여의도에 있는 컨설팅 회사였는데, 조직 생활이 제겐 안 맞더라고요. 그만두고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대필 작가가 됐습니다."

임 씨 일상은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집이나 카페, 작업실 등 마음이 닿는 곳을 정해 앉아 노트북을 켜면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내는 전형적인 글쟁이다. 소설가나 시인과 달리, 그가 쓴 글은 남아도 그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말 그대로 '유령 작가'다.

대필 작가 임재균 씨 / 위키트리

자서전을 대신 써달라는 의뢰가 가장 많다. 신문 칼럼이나 기고문, 때론 고소장을 대신 써주기도 한다. 취업준비생들은 자기소개서를 써달라고 한다. 한류 스타를 좋아하는 외국인 팬들도 그를 찾는다. 팬레터를 써달라는 것이다. 대필 작가를 찾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요구하는 게 하나 있다. 대신 쓴 사실을 숨겨달라는 점이다.

이름이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계약상 금지돼있다. 임 씨에게 대표작을 물어봤지만, 그는 "절대 비공개"라며 작은 힌트도 주지 않았다. 대필작가가 정체를 밝히면 자칫 법적 분쟁까지 치달을 수 있다.

임 씨는 "잘 썼는데, 표지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만 칭찬을 받을 때는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감정이 어쨌든 그만큼 대가를 받았고, 억울함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직업적 특성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숨어 있어도 임 씨는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글로 잘 풀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셰프가 되고, 화장을 잘하는 사람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이치다. 임 씨는 "글을 구성하고 잘 쓰는 것도 창조적인 능력"이라고 했다.

임 씨 기억에 가장 남는 대필은 연애편지다. 실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인 또는 아내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글이 서툰 이들은 임 씨를 찾는다. 임 씨는 "꼭 대기업 CEO나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서전을 부탁하실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내 손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유령 작가(고스트 라이터)로 불리는 대필작가들 / pixabay

대필 작가는 '유령'이라는 별명처럼 작업도 암암리에 처리된다. 대필 의뢰인은 출판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작가를 소개받는다. 대필 작가들도 출판사나 인터넷 사이트로 의뢰인을 만난다. 기존 의뢰인이 주변에 대필 작가를 소개하는 경우도 많다. 상당 부분 인맥으로 일을 따내게 된다고 한다.

임 씨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땐 인터넷 사이트에 의존하게 된다. 외국인이 의뢰하는 팬레터의 경우,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제안을 받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출판사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구인구직 코너에 스스로 등록하는 방법도 있다. 자서전이나 편지 등 어떤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도움이 된다.

일이 성사되면 계약금을 먼저 받는다. 대필 작업을 수정까지 마치면, 나머지 수임료를 받는다. 임 씨는 "책이 아주 잘 팔리거나 의뢰인 특성에 따라 특별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고 했다.

대필 작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유명해질 수 없다. 임 씨는 "직업으로 분류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남들이 제게 '대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을 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7년 전쯤 지금 아내와 결혼을 허락받을 때 아내 가족는 극심하게 반대했다. 임 씨는 "처음 들었던 질문이 '많이 버냐'였다"며 "가뜩이나 대필 작가는 사회적 지위도 없고 죄인 취급을 당할 때였다"고 설명했다.

등단한 소설가나 시인들도 생계를 위해 대필을 한다. 임 씨는 "대필작가 대부분이 고학력이거나 특정 분야 전문가 수준"이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콘텐츠로 개발해주려면 역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능력은 충분하지만, 인정받기 어렵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도 많다.

문제는 대필 작가가 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유령'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일감이 일정치 못해 비정규직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있다. 임 씨는 "요즘처럼 경제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채용 시장도 줄어들어 자기소개서 일감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도 받지 못한다. 그냥 작가가 아니라 '대필' 작가인 탓이다.

사회보장보험에서도 소외된다. 국민연금이나 국민건강보험도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계약한 대로 돈을 못 받거나, 의뢰인이 부당한 '갑질'을 해도 대필 작가들은 기댈 곳이 없다.

대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임 씨는 "논문이나 입시 논술처럼 대필이 범죄에 악용된 건 대필 시장이 지하에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양성화하면 '대신하면 안 되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논리다.

임 씨는 지난해 11월 한국대필작가협회를 만들었다. 대필 산업을 세상 밖으로 꺼내려는 첫 번째 시도다. 임 씨는 "대필도 엄연한 생계고 수많은 대필 작가가 출판계에 있지만,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대필 작가 임재균 씨 / 위키트리

한국대필작가협회에 등록된 작가는 현재 125명이다. 동료애를 느끼기 위해 또는 일감을 안정적으로 받기 위해 협회에 가입한다. 더러는 수임료를 못 받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협회원이 되기도 한다. 회장을 맡은 임 씨는 "대필 작가들이 워낙 개인적으로 일하는 특성이 강하다. 125명은 전체 대필작가 중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SNS에 빠진 젊은이들이 긴 글도 못 쓴다? 어른들의 비뚤어진 시선이에요. 젊은 친구들 글 얼마나 잘 쓰는데요. 다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보니, 대필 작가를 찾는 거라고 봅니다."

임 씨는 "글을 대신 써주는 게 근본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나이 드신 분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컴퓨터만 하느라 자기소개서조차 쓰기 어렵다고 남한테 부탁하냐'고 비판하지만, 실제 청년들이 쓴 자기소개서 초고를 보면 수준도 높고 맞춤법도 어른들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임 씨는 "일상이 바빠지고, 전문 분야가 세분되다 보니 글도 전문가에게 맡기게 되는 것이 추세일 뿐, 젊은이들이 바보가 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종이와 펜 / pixabay

현재 한국 대필작가계는 일을 대신해주는 '서비스업'과 글을 쓰는 '예술'의 경계에 놓여 있다. 다행히 인식은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임 씨는 "요즘에는 스스로 대필 작가라고 소개하면, 무시하기보다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대필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며 "전보다 인식이 훨씬 개선됐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대필 작가를 전문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임 씨는 "미국 대필 작가들은 공동 저자로 책 표지에 이름도 올린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조금씩 나아지겠지만, 상당히 먼 미래일 것 같다"고 말하며 씁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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