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희재 다큐' 찍는 이유" 강의석 인터뷰

2016-11-1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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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공공장소에서 최소 두 번 이상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공공장소에서 최소 두 번 이상 '나체 시위'를 벌였다. 40일 넘게 곡기를 끊어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군 입대 거부로 1년 넘게 징역을 살았다. 전 서울대 법대생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의외였다.

예비군 훈련 중 다리를 다친 필자 때문에 인터뷰가 한 주 미뤄진 상황이었다. 필자를 보자마자 다리부터 걱정했다. 세간에 알려진 '관종(관심 종자)' 이미지는 없었다. 오히려 순박한 차림과 말투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강의석(30) 씨 이야기다. 지난 3일 서울 성북구 북악산 중턱 북정마을 한 판잣집에서 강 씨를 만났다. 한양도성을 등진 북정마을은 서울 마지막 판잣촌이다. 지난해 10월 이곳으로 이사 온 강 씨는 주방 겸 거실 하나, 방 2칸 전세 2500만 원 집에서 혼자 산다. 1년이 넘었다. "서울에서 담배 피우기 좋은 곳이 여기 만한 데가 없어요" 그는 집 앞마당에서 담배 한 개비를 물고는 이렇게 말했다.

강 씨는 이른바 '어그로(관심)'꾼이다. 대광고 재학 시절인 2005년 '종교의 자유' 단식 투쟁으로 처음 언론의 주목 받았다.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 "법조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얼마 안 가 제적 당했다. 이후 "군대가 왜 필요하느냐"며 징집을 거부했다. 징역살이를 했다.

'어그로꾼' 강 씨의 최근 관심사는 영화다. 2013년부터니 좀 됐다. 대광고 시절 이야기를 각색한 '미션스쿨(2015)' 같은 극 영화도 찍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주업(主業)이다.

"물건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강 씨 카메라도 늘 '요주 인물'을 향한다. 역시 '어그로'로 둘째라면 서러운 변희재 씨다. 강 씨는 변 씨와의 만남을 다룬 다큐멘터리 '애국청년 변희재' 후반 작업에 한창이다. 이 작품이 끝나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신 더불어민주당 임수경 전 의원과 '위안부 비하'로 구설에 오른 세종대 박유하 교수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강의석과 변희재. 양 극단에 선 두 남자의 우정기 '애국보수 변희재'는 내년 3월 개봉이 목표다. 강 씨를 만나 다큐멘터리 작업 과정과 근황을 들었다.

"빨갱이를 죽여라"가 건배사인 사람들

강의석 씨 / 위키트리

강 씨와 변 씨는 원래 악연이다. 강 씨는 지난 2013년 자신을 "친노(친 노무현)종북의 아이돌 스타"라고 말한 변 씨를 고소했다. 강 씨는 당시 한 종합편성채널 시사 프로그램에서 "실력 없는 언론플레이의 귀결은 법정 피고인석이다. 곧 (변 씨가)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강 씨는 "변 씨가 (당시)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미안하다. 실수였다'며 바로 사과했다"며 "놀랐다. 이후 (자연스레)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강 씨가 변 씨의 다큐를 찍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4년 12월쯤이다. 당시 강 씨는 '종북 콘서트'라고 비난받던 신은미 씨 강연에 동행하며 그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한 고교생이 신 씨 강연장에서 사제 폭탄을 터뜨렸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런 짓까지 벌이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즈음 변 씨는 신 씨를 풍자해 '종남 콘서트'라는 걸 기획 중이었다.

"신은미 씨 다큐를 찍으며, 반대 입장으로 넣을 영상이 필요했다. 변 씨에게 연락해 '종남 콘서트 현장을 찍고 싶다'고 했다. 겸사겸사 변 씨가 이끄는 산악회에도 동행했다. 신세계였다. (우파 성향이 강한) 그 분들은 특정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고 신영복 선생 서체가 소주병에 적혀 있다는 이유였다"

고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20년 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전향서를 쓰고 감옥을 나왔다. 일부 우파들은 속된 말로 그를 "상 빨갱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 씨는 "(이들의) 건배 구호가 뭔 줄 아나. '빨갱이를 죽여라'다"라며 "둘(좌파, 우파)은 서로를 너무 안 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촬영 때는 주변 걱정, 끝나니 제작비 걱정

작업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강 씨에 따르면 둘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기분이었다. "이용당할 수 있다", "뒤통수 칠 수 있다", "변절한 거 아니냐" 주변에서는 둘 관계를 놓고 우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왜 저런 빨갱이랑 어울리냐'며 칼 들고 (촬영 현장에)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촬영할 때는 그런 게 일상이었다."

촬영이 끝나자, 현실적 문제가 엄습했다. 제작비다. 강 씨는 최근 한 소셜펀딩사이트에서 '애국청년 변희재' 후반 작업에 필요한 제작비를 모금했다. 1000만 원이 목표였지만, 186만 원밖에 모이지 않았다. 목표 금액 도달에 실패하면 지금까지 모인 후원금은 후원자들에게 자동 반환된다. 결국 모금액은 '0원'이었다.

다큐멘터리 '애국청년 변희재'

"기술보증기금(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기술을 평가해 이를 보증해 주는 준정부기관)을 찾아가 '노네임 필름(강 씨가 세운 영화사)' 명의로 보증을 서 6000만 원을 빌려 왔다. 그걸로 여기(집)도 빌리고, 컴퓨터도 사고, 촬영에 필요한 진행비를 충당했다. 앞으로 박유화 교수, 임수경 씨도 촬영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크다"

감독으로서 '생명 연장'을 하려면, 새 영화 제작은 필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강 씨는 "펀딩 금액을 보고 '('애국청년 변희재'의) 개봉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작비가 없어 앞으로는)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음악이 없든지, 색 보정이 없든지 할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살았으면"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영화 '8마일(2002)'에 나오는 대사다. 그의 현재 처지를 잘 설명하는 말일지 모르겠다. 강 씨는 영화가 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든, 극 영화든 상관 없다. 실제로 그의 첫 연출작 '미션스쿨(2015)'은 극 영화다. 대광고 시절 단식 투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대광고 재학(2004) 당시 강의석 씨. 단식으로 인해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 연합뉴스

'미션스쿨'의 전국 관람객 수는 200명 남짓. 흥행과 평 모두 실패했다. 네이버 영화 '미션스쿨' 평점은 3.54점(이하 10점 만점, 14일 기준)이다. 전문가 평점은 4.25점이다. "당신은 영화감독으로 재능이 한참 떨어진다. 영화 더럽게 못 만든다", "군대 안 가고, 감옥 갔다 온 쓰레기의 배설을 영화화했다" '미션스쿨' 아래 달린 댓글 가운데 일부다.

강 씨는 "(악플은) 당연하다고 본다. 나도 ('미션스쿨'이) 너무 불만족스럽다"며 "스태프과 배우 분들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영화에 헌신했다. 그런데 그만큼 준비와 내 능력이 따르지 않아서 잘 안 됐다"고 했다.

이어 "그나마 내 몫을 다한 게 있다면 (영화를 위해) 고생하신 분들이 영화를 볼 수 있게 극장에서 개봉했다는 것"이라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대광고 단식 투쟁, 군 반대 누드 퍼포먼스, 병역 대신 징역, 다큐멘터리 작업. 강 씨의 종횡무진 행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뭘까. 바로 '하고 싶은 말하며 사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넘어가다 보면 아무 것도 변하는 게 없다. 개인적으로 최근 '최순실 게이트'보다 문학계 성추행 폭로, 이런 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목소리가 일상에서 나올 때, 세상은 변한다. 박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바로 세상이 변할까. 적어도 내게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변화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강의석 씨 눈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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