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석 경희대 교수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으로만 말할 수 없는 거장”

2017-01-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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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석(55) 경희대 교수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 전시 후기를 남겼다.

이관석 교수 (왼쪽) / 위키트리

이관석(55) 경희대 교수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 전시 후기를 남겼다.

지난달 30일 이관석 교수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현대건축 아버지 : 르 코르뷔지에' 전시를 관람했다. 이관석 교수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많은 도면과 회화를 볼 수 있어 좋다"라며 호평을 남겼다. 그는 전시장 동방 여행 스케치 섹션을 보던 중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 범주로만 묶을 수 없는 거장"이라고 말했다.

르 코르뷔지에 전시 / 위키트리

이 교수는 동방 여행 스케치 작업에서 드러난 르 코르뷔지에 세계관에 주목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24살 때 6개월간 친구 오귀스트 클립스탱(Auguste Klipstein·1885~1951)과 함께 보헤미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그리스 등 지중해와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여행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서 자기 독자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결같이 붉은 풍경은 시점에 의해 빛이 반사된 것이다. 이 신전 대리석엔 푸르른 하늘과는 대조적인 새로운 구릿빛에 대한 갈망이 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진짜 테라코타처럼 붉은 갈색으로 보인다.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단색을 통해 그런 미묘한 감정을 경험한 적 없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내 마음과 심장을 압도했다. 숨이 막힌다.

- 르 코르뷔지에, 1911년 동방 여행 중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빛들이 노란색을 띤다. 비잔티움 궁에 있는 모든 대리석 조각과 보물들, 그리고 이슬람국 보석들 또한 그곳에 있다. 천상이 이렇게 화려할까.

- 르 코르뷔지에, 1911년 동방 여행 중

르 코르뷔지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범선 (1911)' / 르 코르뷔지에 재단

이관석 교수는 국내에서 르 코르뷔지에 책을 가장 많이 번역했다.

위키트리

Q : 전시에 대한 소감은?

A : 이번 전시는 규모가 크다. 르 코르뷔지에가 1965년 죽었으니 50주기가 넘었다. 이런 시점에 르 코르뷔지에 도면과 회화를 볼 수 있어 마음이 벅차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 대부분이 즐겁게 관람하는 것 같아 좋다. 우리나라는 건축에 대한 몰이해가 심한 나라다. 이런 훌륭한 전시를 통해 많은 이들이 '좋은 건축'에 대해 깨닫는 기회를 얻길 바란다.

Q : 전시를 둘러보며 "이 전시는 올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새롭다"라고 말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지.

A : 롱샹성당이 기억에 남는다. 롱샹성당은 3개 채플이 높게 솟아있다. 그중 가장 높은 채플 아래로 유입되는 빛은 내가 본 빛 중 가장 아름다웠다. 보통 롱샹성당을 방문한 사람은 남측 여러 크기 창을 통해 다채로운 색을 머금고 들어오는 빛에 감명받는다. 나는 채플 아래로 떨어지는 빛이 좋았다. 영원에 가까운 질서를 머금은 그 빛을 지금도 잊기 어렵다.

르 코르뷔지에 '롱샹 성당' (1955) / 코바나 컨텐츠

Q : 이번 전시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젊은 시절 그렸던 '동방 여행 스케치'도 포함됐다.

A : 동방 여행은 스위스 작은 산골에 있던 꿈 많던 젊은이, 르 코르뷔지에로 하여금 시대 정신에 눈뜨게 했다.

르 코르뷔지에를 두고 "기능주의자, 건축을 메마르게 한 사람" 정도로 평하는 이가 많다. 오해다. 르 코르뷔지에는 작은 시골 마을도 많이 여행했다. 그는 전문 건축가가 아닌 일반인이 지은 단순하고 하얀 집들을 보며 "파리에 있는 웅장하고 장식적인 건축과는 다른 건축을 해야 할 시간이다"라고 느꼈다. 동시에 각 지역 민속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당시 건축을 유일하게 교육했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는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에게 로마 상(Grand Prix de Rome)을 주고 로마로 국비 유학을 보내 과거 유적을 연구하며 건축을 공부하게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학생을 프랑스 시골 마을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그런 곳에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사람 손이 느껴지는 단순하고 작은 집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고 여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혁신적인 말을 많이 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만큼 싫어하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았다. 선각자였기 때문에, 그는 늘 주류 세력과 갈등했다.

위키트리

Q : 앞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 범주로 묶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방금 답변과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A : 건축가 대부분은 개인 건축 철학과 작품을 분석하고 거기에 에피소드나 역사적 해석을 추가하면 어느 정도 생애 줄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알다시피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회화를 통해 건축을 연구했다"는 말도 남겼다. 우리 눈에도 그게 보인다. 그는 도시계획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모듈러'가 그렇다. 인간 몸에 맞는 치수를 새롭게 연구해 건축에 적용한 사람이다.

그는 통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파리 시청 최상층 전체가 통계국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위해 필요한 통계치를 얻고 싶었다. 막상 보니 마땅한 게 없었다. 그는 직접 통계를 연구하기 위해 국가에 연구비를 신청했는데 삭감된 금액을 받고 투덜댔다. 이런 시도는 그가 건축가 범주를 넘어선 '훌륭한 사상가'임을 보여준다.

르 코르뷔지에 '열린 손' (1963) / 코바나 컨텐츠

Q : 위키트리는 청소년 독자가 많은 매체다. 청소년들이 르 코르뷔지에 작품을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A : 건축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와 환경을 조성하는 토대다. 르 코르뷔지에는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헤게모니와 대항하며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건축을 공부하지 않는, 혹은 공부할 일 없는 일반인이라도 이런 점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알 필요가 있다.

(르 코르뷔지에 전시는 오는 3월 26일까지 열린다.)

home 권지혜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