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비윤리적 실험' 7선

2017-01-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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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인류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인권과 윤리의 개념이 명확치 않았던 때 행해진 조금은 '끔찍한' 비윤리적 실험 7선을 소개한다.

1. 터스키기(Tuskegee) 매독 실험

Wikipedia

1932년에서 1973년 사이 미국에서 벌어진 매독 생체 실험이다. 매독에 걸린 환자들의 몸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확인하고 이들의 피를 이용해 매독 백신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미국 공중 보건국은 "매독을 치료해 준다"는 거짓말로 이들을 속였다

보건국은 매독에 걸린 환자들과 비교 대상이 될 이들 600명을 모아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지역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보건국이 정한 실험 참가 매독 환자 기준은 3가지였다. 첫째, 25세 이상 60세 이하인 사람. 둘째, 매독을 5년 이상 앓은 사람. 셋째, 흑인.

보건국은 매독을 치료해 준다며 아무런 효과도 없는 비타민을 투여했다. "나쁜 피를 뺀다"며 이들의 혈액을 실험용으로 무상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고 죽어간 셈이다.

이 실험의 핵심 인물인 존 커틀러 박사는 결국 매독 백신 발명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서구권에서 슈바이처와 함께 '가장 존경받는 의사'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죽고 나서 이 끔찍한 실험은 드러났고, 역사는 그를 '백색 가운을 입은 악마'로 기억하고 있다.

2. 작은 앨버트 실험 (Little Albert Experiment)

Wikimedia Commons

1920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존 왓슨은 궁금증을 하나 품게 된다. "인간의 공포는 학습되는 것인가, 아니면 갖고 태어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을 내기 위해 왓슨은 9개월도 안 된 아이를 섭외해 '작은 앨버트B'라는 실험 명을 붙이고 실험을 시작했다. 아이 부모에게 구체적인 실험 목적과 방법은 숨긴 채였다.

왓슨은 아이에게 흰 쥐, 토끼, 개, 원숭이를 만지게 하고는 그때마다 망치로 쇠막대기를 두드리며 굉음을 냈다. 일주일 간격으로 총 일곱 번 반복했다.

처음엔 동물들에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는 실험이 반복되자 작은 흰 쥐를 보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이후 앨버트는 흰색 털이 있는 모든 동물, 심지어 산타클로스 수염에 까지 공포를 느꼈다.

왓슨은 같은 실험 방식으로 이번엔 공포감을 없앤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상황을 알아챈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리며 이 비윤리적인 실험은 일단락됐다.

90년이나 지나 이 아이의 이름이 더글러스 메리트(Douglas Merritte)였다는것이 밝혀졌다. 메리트가 이 실험 종료 5년 후 '뇌수종'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해당 실험이 뇌수종의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때론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3. 바이프홀름(Vipeholm) 연구

스웨덴 바이프홀름/Wikimedia Commons

1930년대 스웨덴 정부는 치솟는 충치 환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정부는 공중 구강보건국을 신설하고 충치 예방을 위한 대규모 연구를 계획한다. 문제는 당시까지만 해도 무엇이 이를 썩게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웨덴 정부는 1945년부터 1954년까지 바이프홀름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탄수화물, 지방 등 여러 성분의 음식을 먹이고 치아의 변화를 관찰했다.

당분과 충치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 설탕이 들어간 사탕과 초콜릿 등을 집중적으로 섭취시키기도 했다. 이 실험으로 대부분 환자들의 이가 썩거나 완전히 닳아 없어지게 됐다.

이 비윤리적인 실험은 결국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동시에 치의학계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으며 많은 학자에게 인용됐다.

윤리와 과학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다.

4. 제임스 마리온 심스의 '부인과(科)' 실험

제임스 마리온 심스 박사/Wikimedia Commons

미국인 제임스 마리온 심스는 여성의 생식과 관련된 의학인 '부인과'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러나 이 의학적 성취는 흑인 노예 여성들의 끔찍한 희생을 발판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1880년대 후반 심스는 16개 간이침대를 마련해 멀쩡한 흑인 여성 노예들을 입원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종 부인과 수술을 실험한다. 아나르차(Anarcha)라는 한 여성은 무려 30번이 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심스는 절개 전 어떤 마취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마약인 아편을 주곤 했다.

심스는 때때로 이 부인과 수술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행하기도 했다. 다른 외과 의사들은 수술받는 노예 여성을 관찰했고, 때때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성을 꼭 붙잡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흑인 노예 여성을 인간 이하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실험이다.

5. 밀그램 실험

밀그램 실험 지원자 모집 포스터/Wikimedia Commons

1961년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은 '인간과 권위'의 본질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는 "인간은 얼마든지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고 이는 개인의 성격보다 주변 상황에 좌우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밀그램은 일반인들을 모집하고 이들에게 '체벌이 학습 효과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나누고 학생을 전기 충격 의자에 앉게 했다. 선생님 역할을 맡은 피시험자는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틀릴 때마다 강도를 조절하며 전기 충격을 줘야 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전기 충격을 받은 학생이 학습 능력이 향상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선생님 역할을 맡은 피시험자가 얼마나 강한 전기 충격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학생 피시험자는 배우였으며 전기 충격도 가짜였다.

실험 결과, 놀랍게도 65%의 피실험자가 최대치인 450V까지 전압을 높였다.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이라곤 4달러뿐이었고, 밀그램은 주춤하는 피시험자에게 "우리가 모든 걸 책임진다"고 말하며 간접적으로 개입했을 뿐이었다.

심리학적으로는 기념비적인 실험이었을 테지만, 피시험자들의 정신적 외상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여론으로 밀그램은 결국 대학에서 해임된다.

6. 스탠퍼드 감옥 실험

Wikimedia Commons

밀그램 실험의 확장판이다. '루시퍼 이펙트'라고도 불린다. 밀그램 실험 후 딱 10년 후인 1971년, 스탠퍼드 대학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실험을 계획한다.

그는 24명의 매우 '정상적인 남성'들을 선발해 죄수와 교도관 역할을 무작위로 맡겼다.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에 마련된 가짜 감옥에서 일종의 역할극을 하게 했다.

이 실험은 예상보다 빠른 6일 차에 종료된다. 역설적으로 피시험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에 '너무나 잘' 적응했기 때문이다.

실험은 시작되자마자 짐바르도의 통제를 벗어났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굴욕적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가혹 행위를 했다. 소화기로 수감자를 공격했으며, 성적인 모욕을 주기도 했다.

36시간이 지나자 한 수감자가 결국 폭주했다. 그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겁을 먹은 것이다. 모두가 이것이 실험이라는 것을 알았고 며칠 전까지 아주 '정상적인' 삶을 살던 이들이었다.

세계가 주목할 만한 놀라운 실험이었지만 곧 윤리적인 비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성을 무너뜨리는 비윤리적인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짐바르도는 "여자친구인 마슬락(Maslach)이 '이 실험은 비윤리적이야, 그만둬!'라는 말을 한 후 실험을 끝내게 됐다"며 "마슬락이 충고하기 전까지 이 실험을 직접 본 50여 명이 아무도 도덕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진짜 실험에 든 인물은 교도관, 수감자가 아니라 무섭도록 차가운 눈으로 이들을 지켜본 짐바르도와 동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 괴물(Monster) 실험

해당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픽사베이

1939년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웬델 존슨 박사는 칭찬과 비난이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했다. 그는 대학원생인 매리 튜더와 함께 22명의 멀쩡한 고아들을 불러모아 '말더듬이 실험'을 시작한다.

존슨 박사는 22명의 아이를 두 개조로 나눴다. 한 개조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말을 잘한다"고 칭찬했다. 다른 조에는 "말을 자꾸 더듬는다, 말을 이상하게 한다"며 심하게 나무랐다.

끊임없이 혼난 아이들은 결국 모두 말더듬 증상 등 언어 장애를 나타냈다. 존슨 박사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고아 아이들을 말더듬이로 만든 것이다. 이 실험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은 평생 언어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 실험을 알게 된 동료 학자들은 이 실험의 비윤리성에 경악했고 '괴물 실험(The moster study)'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그 무렵 나치 치하의 독일이 행한 생체실험이 문제가 되고 있던 터라 아이오와 대학과 웬델은 이 실험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결국 이 비윤리적인 실험은 공개됐고 2001년 아이오와 대학은 공식으로 사과했다. 너무나 늦은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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