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죽음 맞은 20세기 인물 8명

2017-02-17 08:40

add remove print link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그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러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그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면 '황당한' 죽음도 일어난다. 죽음이라는 불행을 황당한지 아닌지 따지는 거야 말로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다. 하지만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또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는 사람들이 있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말이다.

황당한 죽음을 맞은 20세기 인물 8명을 소개해 봤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1. 마빈 게이 (1939~1984)

Wikipedia

'왓츠 고잉 온', '렛츠 겟 잇 온'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무수한 명반을 남긴 마빈 게이(Gaye)는 미국 출신 소울 가수다. 1960~70년대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돼 세계적으로 유행한 모타운(Motown) 음악을 확립한 가수로 평가된다.

1939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마빈은 1957년 보컬 그룹 마키스(The Marquees)로 데뷔했다. 그의 전성기는 1970년대에 찾아왔다. 71년 앨범 '왓츠 고잉 온'으로 생애 첫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개인적 삶은 불행했다. 2번의 결혼 실패와 세금 문제가 발목을 붙잡았다. 신경쇠약에 빠진 마빈은 약물에 의지했다. 원래 좋지 않았던 부자 관계마저 점점 악화됐다.

1984년 4월 1일, 그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마빈은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다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향년 45세. 아이러니하게도 그 총은 마빈 자신이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드린 총이었다.

2. 쿠르트 괴델 (1906~1978)

Flickr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 체코 출신 미국 수학자,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Godel)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만 24살이던 1930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그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다. 누구는 평생 노력해도 쌓기 힘들 업적을 20대때 다 이룬 것이다.

그러나 많은 천재가 그렇듯, 괴델의 말년은 불행했다. 1940년대,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괴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괴델은 그 즈음 심각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아내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어떤 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던 1978년, 아내가 병환으로 6개월 동안 입원하자 괴델은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몸무게는 30㎏로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다고 한다.

3. 이사도라 덩컨 (1877~1927)

이하 Wikipedia

18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이사도라 덩컨(Duncan)은 '근본 없는 춤'이라 비난받던 창작 무용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무용가로 평가된다.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한 덩컨은 당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 했다. 하지만 이듬해 유럽으로 건너가 새로운 무용인 '모던댄스'의 시초를 개발하며 일약 무용계 신성으로 떠올랐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에서 무용가로 활약하던 덩컨은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가다가 차 뒷바퀴에 스카프가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덩컨은 목이 졸리고,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4.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 (1866~1923)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Herbert)는 영국 귀족이자, 현지에서 손 꼽히는 부자 가문 카나본 가(家) 출신이었다. 카나본 가문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영국 왕가의 말 관리를 독점 관리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영국에서 제일 먼저 차를 산 사람도 바로 허버트 백작이라고 한다.

1910년대, 허버트 백작은 교통사고 요양 차 이집트를 찾았다가 하워드 카터(Carter)라는 영국 출신 젊은 고고학자를 만난다. 카터는 17살 때 이집트로 유학해 당대 최고의 고고학자였던 윌리엄 피트리(Petrie·1853~1942) 경 밑에서 경험을 쌓은 실력파 학자였다.

카터의 재능과 패기에 반한 허버트 백작은 그를 후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22년 11월, 허버트가 후원하고 카터가 이끄는 연구팀은 드디어 투탕카멘 묘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개월 뒤인 1923년 4월, 허버트 백작은 면도 중 생긴 상처가 합병증으로 번져 사망했다. 모기에 상처를 물린 게 결정적 화근이었다. 얼마나 황당한 죽음이었는지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허버트 백작이 "투탕카멘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근거 없는 소리다.

5. 가레스 존스 (1925~1958)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

배우들이 심심찮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비슷한 사례가 영국에서 일어났다. 1958년 11월 30일, 영국 ITV 드라마 '언더그라운드'에 출연 중이던 배우 가레스 존스(Jones)가 연기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다. 당시만 해도 녹화 방송이 없어, 모든 방송이 생방송으로 이뤄졌다.

촬영 도중 배우가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에 제작진은 패닉에 빠졌다. 더 황당한 건, 존스가 극중에서 심장마비로 고통받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사 측은 "생방송 도중 배우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내용을 긴급 속보로 내보냈다. 그리고 존스 없이 애드리브로 극을 진행했다.

쓰러진 존스는 안타깝게도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향년 33세. 앞길이 창창한 배우의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6. 브랜든 리 (1965~1993)

Flickr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은 '브루스 리' 이소룡(李小龍·1940~1973)의 불운은 아들에게도 이어진 걸까.

뇌에 물이 차는 '뇌부종'이라는 생소한 병으로 사망한 이소룡. 그러나 그의 아들 브랜든 리(Lee)의 죽음은 더 극적이고, 황망했다. 1984년 영화 '크라임 킬러'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브랜든 리는 '리틀 도쿄(1991)', '래피드화이어(1992)' 등 액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할리우드 차세대 액션스타로 떠오르던 중이었다.

그러던 1993년 3월 31일, 공포 영화 '크로우'에 주연으로 발탁된 브랜든은 황망한 총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소품용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는 장면이었는데, 실탄이 장전돼 진짜 총에 맞은 것이다.

브랜든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이소룡 가문 대대로 내려온다는 저주를 다시 대중에 상기시켰다. 할아버지 묘를 잘못 쒀 이소룡 가문에 저주가 내려졌고, 그 저주 탓에 3대가 마흔도 못 넘기고 요절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저주는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소룡과 브랜든 리의 평행이론 같은 죽음을 생각하면 허투루 넘기기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7. 크리스틴 처벅 (1944~1974)

1974년 7월 15일, 미국 플로리다 주(州)의 지역 방송국 앵커 크리스틴 처벅(Chubbuck)은 뉴스 진행 도중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자극적 영상을 속보로 전한다는 채널 40 정책에 따라 지금부터는 여태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그리고 처벅은 준비한 38구경 권총을 꺼내 자기 머리를 쐈다. 방송을 보던 시청자와 제작진은 혼비백산이 됐다. 처벅은 즉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5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세계 방송사에 유례 없는 '실시간 자살 중계'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처벅은 평소 우울증이 심했고,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한 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 처벅이 생방송 도중 자살했는지는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처벅의 사망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16년 안토니오 캠포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크리스틴'이다.

8. 댄 안데르손 (1888~1920)

Wikimedia

사이안화수소는 농약의 주 성분으로, 주로 해충 제거 목적으로 쓰인다고 한다.

1920년, 9월 스웨덴 스톡홀름 헬만(Hellman)호텔의 한 직원은 벼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죽이고 죽여도 어디선가 다시 기어나왔다. 그때, 직원 머릿속에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맹독성 물질인 사이안화수소를 뿌려 아예 씨를 말리기로 한 것이다.

직원은 11번 방 이곳 저곳에 사이안화수소를 뿌려댔다. 그리고는 제대로 제거하지 방을 빠져 나갔다. 그 방에 같은 달 16일, 한 시인이 묵었다. 시인은 몇 시간 뒤 사망한 채 발견됐다. 사인은 사이안 중독.

자연주의를 표방한 스웨덴 시인, 작가 댄 안데르손(Andersson) 이야기다.

사는 내내 방랑과 빈곤을 거듭한 안데르손은 죽음마저도 초라했다. 스웨덴 예테보리 시(市)는 그의 죽음을 기려 1988년 시내에 동상을 세웠다.

home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