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다고 담배를 안 피울까?" 아직도 갈길 먼 ‘혐오 그림’

2017-03-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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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그림 도입과 함께 팔린 한정판 담배케이스 / 위키트리 10년차 애연가 오모(27)

혐오 그림 도입과 함께 팔린 한정판 담배케이스 / 위키트리

10년차 애연가 오모(27) 씨는 담뱃갑에 '혐오 그림'이 삽입된다는 소식에 발빠르게 '한정판 담배 케이스'를 구입했다. 혐오 그림에 마음 불편해지지 않고 마음껏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다. 오씨처럼 혐오 그림 때문에 "담배를 끊어야지" 결심하기보단, "가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지닌 흡연자들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3일 담뱃갑에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경고 그림(이하 혐오그림)을 삽입했다. 담뱃갑 뚜껑 부분 앞 뒷면에 폐암, 후두암, 구강암 등 담배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각종 질병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3일 “2017년 2월 담배 판매량이 3개월째 감소세”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위키트리가 살펴본 결과, 기재부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혐오그림이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지난해 2월과 지난 2월을 비교해보면 담배 판매량(팔린 양)과 반출량(시장에 풀린 양) 모두 줄어든 게 맞지만, 2015년 2월과 비교하면 오히려 판매량과 반출량은 각각 32.5%, 44.1% 증가했다.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실제로 흡연자들과 담배 판매자들 사이에서도 미지근한 반응이 많다. 8년 차 흡연자인 장 모(29) 씨는 금연 다짐 하루 만에 포기했다. 장 씨는 “술 마실 때나 짜증이 날 땐 흡연 욕구가 강해진다”며 “혐오 그림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끊어야겠다’는 메시지를 줄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양 모(29) 씨도 “혐오그림을 보면 ‘아 안됐다’라는 생각만 들뿐, 오히려 더 짜증 나서 한 대 피우게 된다”고 털어놨다.

혐오그림은 흡연자들 사이에서 효과적인 금연 도구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화두일 뿐이다. 오 씨는 “회사에서 담배 피우는 ‘스팟(장소)’에 모여 담배를 피우다가 어떤 혐오그림인지 서로 담뱃갑을 나눠보거나 어떤 혐오그림을 그나마 선호하는지 농담을 나누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익명으로 대화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혐오그림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볼 수 있었다. 한 네티즌은 “귀여운 스티커를 붙여 가리거나 찢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적었다. 다른 네티즌도 “덕분에 삭막한 현실에서 소소하게 알루미늄 케이스를 선물로 나누는 미덕이 생겼다”고 비꼬았다.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에서 파는 담배 케이스. 1만 원대 제품부터 30만 원이 넘는 ‘명품 담배 케이스’도 있다 / 뉴스1

담배를 파는 소매상점도 혐오그림 도입으로 담배 판매량이 줄진 않으거라 봤다. 수원시 정자동에 있는 한 소매점 주인 A씨는 “올해 들어서 담배 판매가 줄긴 했는데, 원래 연초에는 판매량이 준다. 새해 다짐으로 금연들 많이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겨울에는 또 추워서 담배를 덜 피우게 된다. 3월 되고 날이 풀리면서 저희 가게 판매량은 실제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담뱃갑 혐오그림 삽입 후 판매량이 줄었냐는 질문에 서울 정동에 있는 편의점 직원 B씨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B씨는 “담뱃갑 판매가 줄긴커녕, 알루미늄 케이스 판매와 손님들 짜증만 늘었다”며 “그나마 덜 징그러운 아이 얼굴(간접흡연 경고), 여자 얼굴(피부 노화 경고), 연기 그림(임산부 흡연 경고) 같은 것만 많이 찾는다”고 토로했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담배 판매자가 되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편의점 직원 B씨는 “덜 징그러운 혐오그림을 골라달라며 진열된 담배를 다 꺼내달라는 경우도 많고 돈이나 카드를 던지면서 내게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정동의 다른 편의점 직원 C씨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일하면서 보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파는 모습 / 뉴스1

혐오 그림을 피하기 위한 꼼수도 판치고 있다. 편의점 직원 C씨는 담배회사 영업 직원에게 '혐오 그림이 안 보이게 진열하는 방법'을 살짝 전수받기도 했다. C씨는 "편의점 커뮤니티에는 혐오그림을 가릴 수 있도록 전용 스티커를 제작해 무료로 배포할 테니 신청하라는 글도 올라온다"고 귀띔했다.

혐오그림 삽입이 금연 효과를 높이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 공통 의견이다. 한국금연 운동협의회 서홍관 회장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효과적인 금연정책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유럽연합(EU)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판매되는 담배는 경고 그림이 차지하는 비율이 담뱃갑(면적)의 65% 이상으로 우리나라(50%)보다 넓다”고 설명했다. 한국 담뱃갑은 절반인 50%가 혐오 그림이라고 하지만, 경고 문구를 뺀 그림만 보면 차지하는 면적은 30%에 그친다.

프랑스 카뉴쉬르메르의 한 담배 가게에서 파는 담배들. 한국과 비교했을 때 혐오 그림 수위가 더 높고 눈에 확 띈다 / 카뉴쉬르메르 = 로이터 뉴스1

실제로 혐오그림이 효과가 있으려면 차지하는 면적 크기가 충분히 커야 한다. 국제금연정책 평가프로젝트(ITC Project)에 따르면 2006년 태국이 혐오 그림을 담뱃값 면적 85%에 적용한 결과 흡연자 53%는 담배에 따른 건강 위험을 더욱 인지할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연구에서 흡연자 44%는 금연 의지가 강해졌다고 나타났다.

혐오그림을 아예 담뱃갑 한 면 전체에 삽입하는 사례도 있다. 브라질은 2002년 혐오 그림을 도입하면서 흡연율을 31%에서 22.4%로 낮췄다. 호주도 담뱃갑 전체 면에 혐오 그림과 경고 문구를 삽입하고 있다. 또 담배 제조사마다 담뱃갑 색깔을 다르게 하거나 독특한 무늬를 새기는 등 디자인을 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제지했다. 이 정책 덕분에 호주 담뱃갑은 세련되거나 멋지다는 인상 대신 ‘건강에 해롭다’는 정보만 제공한다.

보건복지부 제공

하지만 정부는 '혐오 그림' 효과를 높이려는 방안을 딱히 마련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담뱃갑 혐오그림을 현재보다 더 키울 예정이 있는지에 대해,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는 "현재 논의 중인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혐오 그림이나 경고 문구를 담뱃갑 면 전체에 확대 적용하는 방침 역시 논의되지 않고 있었다.

기재부가 낙관적인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많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실 관계자는 “정책이 도입된 지 이제 세 달 정도 됐는데, 잘 됐다고 평가하기엔 아직 많이 이르다“고 꼬집었다.

김승희 의원 등은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계류중인 상태다. 김승희 의원실 관계자는 “힘들게 도입한 경고 그림을 가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과태료를 부과하자는 내용으로 법안 발의를 했지만, 아직 법안소위(법안심사소위)에 오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 금연정책 변화 과정

1986년: 담배사업법에 의해 담뱃갑 경고 문구 표기 및 담배광고 제한

1995년: 국민건강법 제정에 따라 금연구역 설정 및 담배 자동판매기 설치 규제

2002년: 담배 성분 중 타르와 니코틴 성분공개

2005년: 금연클리닉(보건소·민간단체), 금연상담 전화, 군·전·의경 금연지원 등 금연 사업 확대

2007년: 경고 차원에서 담뱃갑에 6개 발암물질 표기

2009년: 군 면세 담배 폐지

2010년: 지방자치단체 조례로 공공장소에 금연구역을 지정하고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함

2011년: 담배광고 금지를 강화하고 법정 금연구역도 확대. 전자담배에 건강증진부담금 과세

2012년: 모든 공중이용시설에서 금연, 담뱃갑과 광고에 표기하는 경고 문구 추가. 담뱃갑과 광고에서 향 물질 표시 금지, 담뱃갑에 금연상담 전화번호 삽입

2014년: '저타르, 라이트' 문구 사용 금지. 금연지도원(금연구역 내 흡연행위를 단속하는 인력) 제도 도입

2015년: 담뱃값 인상(2500원 → 4500원), 일반/휴게음식점 전면 금연구역 확대, 일반 병·의원 금연치료 지원 등 금연지원서비스 확대

2016년 4월: 서울 모든 지하철역 출입구 10m 이내 흡연 금지. 흡연 적발 시 과태료 10만 원으로 통일

2016년 12월: 담뱃갑에 흡연 경고 그림 표시 의무화

출처: 국립암센터 '금연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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