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자자"… 성추행·폭언에 눈 감는 여행업계

2017-03-2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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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뉴스1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너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잘 테니

이하 뉴스1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너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잘 테니 같이 자자."

"칼 가져와 죽여 버리게. XX 것들이 어디서 XX들이야."

여행업계에서 간부 직원이 부하 직원에게 폭언이나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솜방망이' 징계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주먹구구로 운영되는 영세한 규모의 업체가 많은 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형성된 실적 중심의 기업 문화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중견 A여행사에서 중국영업부 B부장의 상습적인 폭언과 성희롱을 견디다 못한 직원 15명이 최근 잇달아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부서 직원들은 퇴사 전 A여행사 대표이사에게 찾아가 B부장의 매일같이 반복되는 과격한 언행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사측은 처음에 별다른 징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측에선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회사 수익 올려주는 사람”이라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퇴사자가 점차 늘면서 일이 커지자 B부장을 다른 부서 차장으로 강등시켜 전보 발령을 했으나 '솜방망이' 징계라는 사내 비판이 여전히 거세다.

A여행사의 퇴사자들은 B부장이 사직서를 제출해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퇴사자 L씨는 “B부장이 이전 직장에서 A여행사로 이직한 이후 1년 4개월 동안 수습직원을 포함해 그만둔 직원만 해도 80여명이 넘는다”며 “본인 때문에 직원이 그만두겠다고 하면 윗선에서 '사람 관리 못 한다'는 질책을 받을까 사직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를 견디다 못해 퇴사 절차 없이 그냥 출근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둔 직원이 12명이나 됐다. 뉴스1이 입수한 녹취록을 보면 B부장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직서를 제출한 직원에게는 “인수인계 파일로 해! 쌍욕 나오네 죽고 싶어? X가리 찢어버려?” “인수인계 똑바로 안하고 나가는 순간 X가리에 칼 꽂을 거야, X새끼들아”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B부장은 앞서 지난 2월에도 근무한 지 3일 된 신입직원을 성추행해 징계위원회에서 연봉 감봉 조치를 당한 바 있다. 하지만 성추행 피해자와 소송 합의금 2000만원은 A여행사에서 대신 지급했다.

A여행사 퇴사자와 업계 관계자들은 B부장이 직전 직장에서도 폭언을 일삼았으며, 출장을 갔을 때는 여직원들의 숙소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자자고 하거나, 퇴근 후 전화해서 “사랑한다. 주말에 영화 보자” 등의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C여행사의 경우 해외여행영업부서장이 회식자리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옆자리에 앉은 여직원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노래방에서 몸을 밀착하는 행위를 벌여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처음엔 6개월 정직 처분이 내려졌으나 해당 부서장이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질 않는다"며 청원을 해 재논의 후 3개월로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C여행사 관계자는 "징계위원회가 실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임원들로 구성돼 솜방망이 징계가 나왔다"며 "당시 피해 여직원은 다른 부서로 옮겼으나, 징계위원회에서 성희롱 현장을 증언한 일부 직원들은 이후 보복 차원의 '과다 업무지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성추행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는 대형 여행사도 비슷한 실정이다. D여행사의 경우 이사에게 성추행당한 여직원이 회사 게시판에 글을 올려 문제의 이사가 퇴사했지만, 성추행 가해자는 두 달 후 바로 복직했다.

업계에선 폭언과 성희롱이 특정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폭언·폭행·성추행 문제는 업계에선 예삿일이 된 지 오래"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윤리 의식을 뒷전으로 둔 채 실적 중심으로만 회사를 주먹구구로 운영하다보니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매출에 기여하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피해자들이 상담센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권했다. 이호선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자문위원은 "여행사 대부분이 회사에 약간의 피해라도 입히지 않으려도 자체 징계위원회에서 엄중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징계가 적절했는지 외부 평가 기관의 감시가 필요한데 이 부분에 대해선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야 할 사항이라 현실적인 해결 방안은 아직까진 없다"고 말했다. 서울해바라기센터 관계자는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 혼자 끙끙 앓는 이들이 많다"며 "2차 피해와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의 용기 있는 신고와 상담"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상담센터는 비밀보장을 하고 상담을 진행하며 필요 시 경찰 진술서 작성을 도와주며 의료팀도 상시 대기하고 있다"며 "국선변호사와 함께 법적인 절차를 밟게 되고 감봉, 정직, 사직 등의 권고사항을 제시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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