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세월호 '노란 리본'은 다 어디서 왔을까

2017-04-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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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 전성규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엔 분향소를 비롯해 각종 세월호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 전성규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엔 분향소를 비롯해 각종 세월호 참사 추모 시설들이 잔디 양 옆으로 들어서 있다. 시설들은 28.8㎡ (8.7평) 정도 되는 컨테이너 가건물로 지어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마주 봤을 때 왼쪽 줄 첫 번째 컨테이너 건물은 ‘노란리본공작소‘라 불리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를 제작한다.  

유난히 화창했던 지난 11일 오전. 노란리본공작소 안엔 긴 책상을 마주보고 앉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 9명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가로 60cm, 세로 45cm짜리‘ 노란색 압축스펀지를 '가로 약 7cm, 세로 0.6cm‘ 조각으로 자르고 있었다. 스펀지 조각이 벚꽃잎처럼 흩날렸다. 

 

얇고 길게 잘린 노란색 스펀지를 리본 모양으로 만들어 고정하면, 옆 사람은 리본을 철제 고리에 끼웠다. 작업은 쉴새 없이 이뤄졌다. 마치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컨테이너 입구 위쪽엔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라고 적힌 깃발이 휘날렸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3년간 흔히 보던 ‘노란 리본’은 모두 이렇게 수작업으로 탄생했다.  

ⓒ위키트리 디자이너 김이랑

 

'노란리본공작소'는 이곳 광화문 광장 외에 용인, 홍대 지하철 입구, 수원, 안산, 목포 등에도 있다. 홍대에서는 길 위에서 바로 만들어 나눠주고, 수원에서는 주말에 카페같은 곳에 모여 만든다. 광화문 공작소 생산량이 그중에서도 제일 많다. 

이하 전성규 기자

 

리본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단순한 작업이라 처음 온 사람도 5분이면 바로 ‘공정’에 투입될 수 있다.

지난 1월부터 ‘광화문 노란리본공작소’ 총무를 맡은 정찬민(58) 씨는 원래 전통 서각이나 고판화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201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귀국했다가 우연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본 뒤 재능기부에 나서게 됐다. 그는 “원래 이곳(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생산량은 하루에 한 3000개쯤 되는데 3주기가 다가오면서는 하루에 적어도 6000~7000개 만든다”고 말했다. 

리본은 공짜로 배포되지만, 제작 비용이 무료인 건 아니다. 철제 고리가 리본 재료 중 가장 비싸서, 1000개씩 열 묶음(1만 개)에 15~16만 원쯤 한다고 했다. 

비용은 100% 성금으로 충당한다. 컨테이너 앞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직접 들러 성금을 낸다. 계좌 이체로 돈을 보내기도 한다. 

정찬민 씨는 “돈을 낸 사람 이름과 날짜, 금액은 빠뜨리지 않고 장부에 적고 있다. 돈을 쓴 내용도 마찬가지다.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며 장부를 보여줬다. 너덜너덜해진 공책에 돈이 오간 내용이 검은색 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노란리본공작소는 누구나 와서 봉사할 수 있다 

이날 공작소 안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잡담만 작게 오갔다. 한 봉사자는 "광장 취지에 맞게 너무 크게 떠들거나 웃는 행동은 자제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컨테이너 입구 쪽 벽에는 이런 내용을 담은 준수사항이 적혀 있다.

공작소 안에선 식사를 못 한다. “밖에서 보면 ‘잔칫집’ 같다는 인상을 풍길까 봐 그런다”고 한 봉사자가 말했다. 간혹 누군가 들고 오는 빵이나 과자 같은 간식만 먹을 수 있다. 공작소 벽에 붙어 있던 '음식물을 뱃속으로 버립시다'라는 문구는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느라 리본 만드는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까 봐 붙은 말이었다.

 

 

공작소 운영 시간은 보통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주말이나 금요일은 자정까지다. 3주기 추모제를 앞두고선 새벽까지도 불을 밝혀왔다. 

자원 봉사이다보니 봉사자 수는 계속 달라졌다. 1시간쯤 일하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쭉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점심시간이 되니 정장 차림 직장인들이 찾아왔다. 

넥타이와 사원증을 맨 채 들어선 강선곤(47) 씨는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강 씨 손에는 테이크아웃 전용 홀더에 담긴 커피 8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어제는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리본을 만들고 갔는데, 생각해보니 혼자 마시는 게 미안해서 들고 왔다”며 쑥스러워 했다. 15분쯤 직장 동료 두 명과 함께 리본을 만들던 강 씨는 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서둘러 일터로 돌아갔다. 

 

낮에는 주부나 프리랜서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 주로 공작소를 채운다. 서울 목동에서 온 주부 남미옥(51) 씨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우리 둘째도 단원고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길바닥에 버려진 걸 TV로 보면서 ‘가만있을 순 없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노란리본공작소는 2014년 6월쯤 유가족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팽목항까지 도보 순례를 다녀온 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천막 안에 처음 세워졌다. 

 

'노란 리본' 이미지는 원래 세월호 참사 직후 한 공부 동아리가 처음 만들었다. 인터넷에 삽시간에 확산되면서 세월호 사건 추모를 뜻하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당시 청와대가 '노란 리본' 이미지를 처음 제작했던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노란색이 노무현 대통령과 무슨 관계냐"라고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노란 리본’은 학술적으로는 ‘사회적 기억의 형성’으로 해석된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학 교수는 “리본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사회화’했다”며 "유가족이 겪는 슬픔에 공감하려는 행위와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끌어 온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봉사자 전한권 씨는 “세월호가 인양됐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가 끝난 건 아니다. 미수습자들이 어서 가족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직도 3년 전 찬 바닷물에 세월호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던 장면이 선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전 씨의 한 손에는 노란 리본이, 다른 손에는 접착제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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