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장사에서 대박난 '서쪽 현자'... 서현역 브러쉬 아저씨

2017-04-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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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입구 8번 출구 근처에 있는 가게 '서현역 브러쉬' / 이하 강혜민 기자 지난 6일 저

홍대입구 8번 출구 근처에 있는 가게 '서현역 브러쉬' / 이하 강혜민 기자

지난 6일 저녁 메이크업 브러시 가게 '서현역 브러쉬'는 손님 20여 명으로 북적였다.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가게다.

60~100가지 브러시가 49.5㎡ (15평) 남짓한 공간에 빼곡히 놓여 있었다. 포인트 아이섀도용 브러시, 립 브러시는 이미 품절이었다. 손님들은 고른 브러시를 한 손에 쥔 채, 매의 눈으로 다른 제품들을 훑어봤다. 누나나 여자친구 대신 온 남자도 있었다.

노란 간판 아래 키 크고 마른 50대 남성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했다. 이 가게 사장이자, 브러시만으로 SNS 스타가 된 '서현역 브러쉬 아저씨' 안모 씨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안 씨 뒷모습 (안 씨 요청으로 얼굴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한 손님이 블로그 글을 참고하며 브러시 고르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이 가게가 흥하고 있는 건 일명 '설명과 검사'라고 불리는 독특한 서비스 때문이다. 안 씨가 손님 한 명 한 명과 상담해주고, 가게에서 고른 브러시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해준다. 길게 줄 서 기다리던 손님들은 자기 차례가 되자 브러시에 대한 여러 질문을 쏟아놓았다.

"쌍꺼풀이 있으면 (아이)라인 섬세하게 그려야 하니까 촛불 브러시, 쌍꺼풀 없으면 총알 브러시 가져가요" 안 씨는 손님이 들고 온 브러시가 적절한지 손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한 뒤 브러시 종류를 추천했다.

"여기에 눈이 있다고 가정을 해봐요~ 이렇게, 이렇게" 안 씨는 손님 손등에 직접 화장을 해줬다. 브러시를 본인 코에 쓱쓱 바르며 시범을 보여주기까지했다.

줄 서 있던 손님들은 꿀팁을 전수받고 싶어 귀를 쫑끗 세웠다. 안 씨 시범을 잘 보기 위해 까치발 드는 사람도 있었다.

설명&검사 테이블에서 안 씨가 뭘 살지 갈팡질팡하는 손님에게 브러시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 강혜민 기자
줄 서 있는 손님들이 몸을 기울여 가며 안 씨 설명을 듣고 있다

안 씨는 브러시를 직접 생산해서 싼 가격에 손님들에게 판다.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 브러시 가격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가게 인기 제품인 블렌딩용 '총알 브러시', '촛불 브러시'는 5000원이다. 코덕(화장품 덕후)들이 "품질은 명품 브랜드 브러시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할 정도다.

이 가게에서 브러시를 사려면 보통 1시간 이상 기다린다. 많을 땐 20~30명까지 대기 줄을 서야 한다. 하루에 손님 150~200명 정도가 온다.

홍대 거리에 있는데도 가게 이름이 '서현역 브러쉬'인 이유는 안씨가 분당 서현역에서 '재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경북 구미에서 온 손님 정모(여·33) 씨는 스스로 "코덕 14년 차"라며, "서현역에 계실 때부터 (안 씨는) 유명했다"고 말했다.

#연 80억 매출 올리던 사업 망하고...

안 씨는 3년간 서현역 앞에서 좌판 장사를 했다 / 이하 안 씨 제공

미용 제품 수출업을 하던 안 씨는 2008년 금융 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매출이) 연간 80억 정도 됐으니까 수출을 꽤 많이 했었죠. 그런데 금융위기 때 바이어들 30~40%가 파산했고 회사는 밑바닥까지 내려갔어요. 빈털털이가 된 거죠"

집도, 몰고 다니던 고급 승용차 에쿠스도 경매로 날아가고 브러시만 남았다. 그는 절망 속에서 분당 서현역 앞에 브러시 좌판을 깔았다. 신고가 들어오면 떠났다가 다시 오고, 구청에 물건 뺏기면 벌금 내고 찾아오는 일의 반복이었다.

안 씨는 "분당은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왔다갔다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 장사할 자리도 (분당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든 회사를 정상화시켜야 겠다는 마음에 브러시 장사에 뛰어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골바람이 부는 서현역 근처는 겨울이 되면 추위가 살 속을 파고들었다. 손님들에게 테스트를 해줘야 하는데 손도 얼고 발도 얼어 잘 되지 않았다.

"사업하다가 갑자기 바깥에 나가서 (장사)하자니 멋쩍고 창피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안 씨에게는 점차 단골이 생겼다. 그의 강점은 풍부한 미용사업 경험에서 우러나온 '친절한 설명'이었다. 품질에 비해 브러시 가격도 저렴했다. 젊은 손님들이 친구를 끌고 다시 찾아왔다. 한겨울에도 편의점 벽을 따라서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다. 한 네티즌은 "콘서트 줄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안 씨는 '서현역 브러쉬 아저씨'로 통하게 됐다. 네티즌들은 '서현'이 제대로 된 화장의 길을 알려주는 '서쪽 현자'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 좌판 장사 3년 만에 대박

지난 2월 좌판에서 장사를 한 지 3년 만에 서쪽 현자는 홍대입구역으로 진출했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써라"는 친구 돈을 보태 가게를 열 수 있었다.

"학생들이 브러시까지는 좋은 걸 써보지 못했더라고요. 기본적으로는 돈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눈앞에서 학생들이 좋아해 주니까 저도 얼마나 좋아요"

코덕들이 던지는 디테일한 화장 질문도 안 씨는 척척 알아 듣는다. 브러시 장사에 직접 뛰어들고부턴 스스로 '풀메이크업'을 해보는 날이 늘었다. "아이섀도 발색 테스트 하고 파운데이션 발라보고, 다 해요. 가족들은 잘 모르지. 사무실에서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웃음)"

서현역 앞에서 좌판 장사할 당시 모습.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의자들이 놓여있다

# "아저씨 저 피부 되게 좋아졌어요!"

"알바해서 번 돈으로 브러시 사는 거 잖아요. 제 마음이 편했겠어요..." 안 씨는 늘 학생들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다. 추운 겨울날 서현역 앞에서 장사하고 있으면 단골들도 안 씨가 걱정돼 핫팩이나 따뜻한 꿀차를 챙겨줬다.

홍대입구역으로 이사한 뒤, 가게에 들어와 "아저씨 그 브러시 저한테 너무 잘 맞아요! 피부 되게 좋아졌어요!"라고 외친 뒤 탁탁탁 도망가버리는 친구도 있었다.

좌판 장사할 때 지나갈 때마다 브러시를 사던 여학생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가져가라"고 할 정도로 브러시를 너무 많이 사가던 손님이었다. 학생은 안 씨 추천대로 특수분장에 관심을 가졌고 방송국에 특수 분장으로 일자리까지 구했다. 이후 한 기획사에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그렇게 잘 된 친구도 있어요" 안 씨는 흐뭇하게 웃었다.

# 입점 제안 끊이지 않았지만...

안 씨는 그간 포털 사이트, 로드숍, 유명 화장품 브랜드에서 "입점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수차례 받았다.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중구난방식으로 확장하면 브러시 품질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였다. 온라인 판매에도 손 대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부산이나 대구에 작은 직영점을 하나 낼까 고민 중이다. 안 씨는 "지방에서 오기 힘든데 학생들이 올라왔다가 찾는 브러시 없으면 얼마나 미안하냐"고 했다.

그러나 당장은 홍대 가게 일로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는 잠깐 담배 피우러 갈 시간만 있으면 딱 좋겠다며 웃었다. 안 씨는 짧은 저녁 시간을 뒤로하고 서둘러 가게로 돌아갔다. 손님 여럿이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에도 한 시간 가까이 대기해야 할 때가 많다

home 강혜민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