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한빛 피디가 구의역 사고 현장에 다녀와서 썼던 글

2017-04-1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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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한빛 피디 페이스북 tvN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고 이한빛 피디 페이스북

tvN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피디가 생전에 구의역 사고 현장에 다녀와 남긴 글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한빛 피디는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1997년생 김 모 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해 5월 31일 서울 구의역 9-4 승강장을 찾았다. 서울 메트로 하청업체 '은성PSD'의 계약직이었던 김 군은 지난해 5월 28일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들어오는 전동차를 피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피디는 이날 페이스북에 "일찍 퇴근했기에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구의역에 갔다"며 추모글을 올렸다. 이 피디는 "막차가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슬픔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짜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솟구쳐 역사를 빠져나왔다"고 썼다.

이한빛 피디는 "구조와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죽음이란 비참함.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또, "이윤이니 효율이니 헛된 수사들은 반복적으로 실제의 일상을 쉬이 짓밟는다. 끔찍한 비극의 행렬에 비록 희망을 노래하는 이가 없을지라도 염치와 반성은 존재할 것이란 기대도 같이 스러진다"고 적었다.

이 피디는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라고 전했다. 이어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고 덧붙였다.

이한빛 피디가 썼던 이 글은 고인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고민들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한빛 피디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비정규직 스태프 해고 문제로 괴로워했다. 지인들에게 촬영, 조명, 장비팀이 교체된다는 소식을 전하며 "판을 끌어온 건 정직원이자 프로그램 책임자인 연출부인데 비정규직들만 희생양이 된다. 여긴 진짜 미친 세상이다"라고 토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한빛 피디는 지난해 10월 26일 '혼술남녀'가 종영된 다음날 목숨을 끊었다. 이 피디 유가족은 CJ E&M에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은 이한빛 피디가 쓴 글 전문이다.

일찍 퇴근했기에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구의역에 갔다.

막차가 올 때까지 자릴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짜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솟구쳐 머리가 아팠기에. 역사를 빠져나왔다.

구조와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죽음이란 비참함.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

이윤이니 효율이니 헛된 수사들은 반복적으로 실제의 일상을 쉬이 짓밟는다. 끔찍한 비극의 행렬에 비록 희망을 노래하는 이가 없을지라도 염치와 반성은 존재할 것이란 기대도 같이 스러진다.

망하지 않아 망하지 못한 세상이다. 아니 망하지 못해 망하지 않는 세상이 맞을런가. 어느 게 정답인지 모르겠다. 둘 중 무엇이든, 답답한 동어반복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이 다시금 한 삶을 부러뜨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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