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나들이 오면 '이상의 집'에 들러 쉬다 가야지

2017-06-2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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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국민신탁 보전재산인 이상의 집을 구경해보자

이상의 집 전경 / 이하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상의 집이 걸어온 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 구절은 이상(李箱)의 소설 ‘날개’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자, 이상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다. 1910년 9월, 한일합방 직후에 태어난 이상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기를 지내오고, 1937년에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요절하게 된다. 이상이 등단한 시기가 20대였으니, 문학가 ‘이상’으로 살아온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또한, 탈근대적인 그의 문학세계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아 그를 재조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긴 과정에서 이상과 관련된 다양한 기념물들은 점차 사라져가게 되었으며, 이상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기릴 수 있는 공간을 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열망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상의 집’이다. 이 이상의 집은 과거 재개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2003년도에 김수근 문화재단에서 매입한 이후 문화재 등록과 둘러싼 갈등을 겪다가, 2009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아름지기가 다시 매입해 2016년까지 아름지기에서 관리해왔으며 현재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관리 중에 있다.

이상의 집 내부

통인동 154-10번지, 그리고 그 집의 구성

엄밀히 말하면, 이상의 집은 실제 이상이 살던 집 자체는 아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바다와 같이 많은 벼슬을 지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는 3살부터 23세에 이르기까지 큰아버지의 집에 봉사손, 즉 대를 잇기 위한 양자로 들어가 지내게 되었다. 이 큰아버지의 집은 통인동 154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 위치하고 있는 이상의 집은 통인동 154-10번지인데, 이는 즉 큰아버지의 집이 총 10조각의 필지로 나뉘어진 것을 의미한다. 실제 지금 세워진 이상의 집은 큰아버지의 집에서 뒷마당과 텃밭 부분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상의 집이 세워진 이 땅에서 이상이 살아오며 작품 활동을 해온 것은 명확하기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당시 이상이 살았던 공간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인동 이상의 집은 두껍고 까만 철문을 기준으로 ‘이상의 집’과 ‘이상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상의 집 공간에서는 철문 밖의 공간인데, 이곳에서는 이상의 다양한 소설, 시, 이상문학상 수상작, 이상 문학 관련 연구도서들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소정의 기부금을 내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작은 탁자들과, 이상과 관련한 엽서들을 판매하고 있다.

이상의 집 뒤편의 까만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새카만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이상의 방’이다. 이상은 그의 자전적 소설인 ‘날개’에서 자신의 방을 ‘어둡고, 습하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즉, 이곳 이상의 방은 소설 ‘날개’의 이미지를 차용해 상징적인 공간을 만든 곳이다. 이상의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문학가 이상에게 헌정한 공간인 이 ‘이상의 방’에서는 시인 이상을 소개하고 있는 짤막한 영상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천재성과 수많은 직업들

이상은 상당히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그가 겪어온 직업들 또한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직업을 들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직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학가였다. 20대에 등단해 짧은 시간을 문학가로 활동했지만, 당시에 남긴 작품들은 현대에 와서 읽어도 괴리감이 들지 않는다. 또한, 이상의 작품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남아있듯이, 이상의 풍부한 감수성과 차별성은 그의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하고 있다.

이상의 두 번째 직업은 건축가였다. 이상이 다닌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으로, 일본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수많은 일본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당시 경성고공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은 총독부 건축기사로 채용되었기에, 이상 또한 건축기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마지막 직업은 화가였다. 이상이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간 이유가 미술부가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을 만큼, 이상은 화가로써의 자질과 흥미가 충분했다. 실제로 이상이라는 이름 또한 그의 화가활동에서 기인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시절, 이상의 친구 구본웅은 이상에게 화구상자를 선물하게 된다. 당시 생활고를 겪기 시작했던 이상은 이 선물에 보답하는 뜻으로, 그의 가명에 상자 상(箱)자를 붙여 이상(李箱), 즉 오얏나무 상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시간을 견뎌온 그의 작품, 그리고 이상의 집

예술이 당시의 상식을 앞서나가면,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사람들의 비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존재한다. 1917년 뒤생이 남성용 소변기를 이용해 출품한 작품 ‘샘’은 당시에 예술을 모독한다는 비난에 휩싸였으며, 출품이 중지될 뻔한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뒤샹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 또한 뒤샹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대중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연작시 ‘오감도(烏瞰圖)’는 결국 기존에 계획한 30회의 연작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15회를 마지막으로 내리게 된다. 하지만, 비록 당대에 그의 문학은 혹평을 받았더라도,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곳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는 이상이 남긴 수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이상을 소개하는 영상을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항상 개관하고 있는 이상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발자취를 보고 한번쯤 사색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

○ 개관시간

화 ~ 일 : 10시 ~ 6시, 월요일 휴관

○ 주소 및 연락처

주소 :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연락처 : 070-8837-8374 (문화유산국민신탁 : 02-752-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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