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다" 덕질에 70억 쏟아부은 해시계 덕후 사연

2017-07-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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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서 빚쟁이가 된 해시계 덕후가 있다.

재벌에서 빚쟁이가 된 해시계 덕후가 있다. 직접 해시계를 연구해 만드는 데만 70억 원 이상을 썼다. 해시계를 알기 전 그는 100억 자산가였다. 덕질에 돈과 인생을 쏟은 그는 현재 신용불량자다. 류세봉(59) 씨 얘기다.

류 씨는 최근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과거 자신이 만든 해시계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통령 선물로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류 씨는 "위키트리 기사를 본 지인들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소식이 알려져 경남 지역 방송국에서도 내 사연을 궁금해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 “덕질은 제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때는 미쳐서 그랬죠….”

류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지역 유지였다. 경남 남해에서 레미콘 회사와 석유 회사, 철강 회사 등 10여 개 회사를 운영했다.

류세봉 씨 / 이하 이정은 기자
류세봉 씨 / 이하 이정은 기자

고등학교도 고향 남해가 아닌 서울에서 다녔다. 그 시절 나름 유학이었다. 그는 타고난 ‘골동품 덕후’였다. 류 씨는 “서울 와서 공부는 안 하고 인사동 골동품 가게만 뒤지고 다녔다”고 했다.

해시계 덕질에 빠진 계기는 30년 전 부산을 여행하다 들른 박물관에서다. 그곳에서 우연히 조선 시대 해시계 ‘앙부일구’를 보게 됐다.

류 씨는 부산의 한 작은 박물관에서 본 조선 시대 해시계 ‘앙부일구’를 구매했다. 이후 그가 스스로 만든 해시계의 표본이기도 하다
류 씨는 부산의 한 작은 박물관에서 본 조선 시대 해시계 ‘앙부일구’를 구매했다. 이후 그가 스스로 만든 해시계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는 해시계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와"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류 씨는 "고향에 돌아와 도자기를 굽는 가마를 짓고, 옆에 박물관도 지었다. 70억 정도 들었다"며 "힘든 사람들, 동네 장애인들까지 70~80명 정도 불러 가마와 박물관에 취직시키고 함께 잘 해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류 씨는 “재산이 사라지는 건 정말 금방이었다”고 했다. 회사를 운영해 번 돈이 가마를 운영하는 인건비와 흙값, 박물관 유지비에 몽땅 들어갔다. 그러던 중 1990년대 IMF 타격으로 시멘트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다른 회사도 줄줄이 무너졌다. 결국, 박물관과 가마에 채용된 고향 사람들도 2년 뒤 뿔뿔이 흩어졌다.

가세가 기울면서도 류 씨의 독특한 덕심은 '기부'로 이어졌다. 류 씨는 “해시계를 만들다 보니 측우기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 주머니를 털어 남해 지역 초등학교 세종대왕 동상 옆에 세울 측우기를 50개쯤 만들어 기증했다.

◈ 해시계만 보면 달라지는 눈빛

류 씨에게 “왜 그러셨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해시계가 좋아서. 그렇게 하고 싶어서” 덕질을 한 것뿐이다.

류 씨에게 해시계를 보는 방법을 물어봤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나오는 카페를 박차고 나와 땡볕에 마주 앉았다.

해시계는 실내에선 의미가 없다. 태양 아래 놓일 때 비로소 시계라는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류 씨가 만든 해시계
류 씨가 만든 해시계

류 씨가 만든 해시계를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래 나침반을 이용해 해시계가 북쪽을 향하도록 평평한 곳에 놓는다. 빨간 침이 북쪽에 정확히 향하도록 맞춘 뒤 위 시계를 보면 된다. 시곗바늘 그림자 끝이 향하는 곳이 현재 시각을 뜻한다.

시계에서 북(北) 글자는 낮 12시다. 왼쪽이 오전, 오른쪽이 오후다. 짧은 선이 1시간, 긴 선이 2시간이다. 해시계 보는 방법을 배울 당시는 오후 2시 35분이었지만, 해시계 바늘은 2시를 살짝 넘긴 지점에 그림자를 남겼다.

류 씨는 “현재 한국 시각은 동경 135도에 맞춰 있어서 해시계로 보는 우리 시간은 30분 정도 느리다”고 설명했다. 해가 지고 나면 시간을 알 수 없는 게 해시계 특징이다. 그림자를 만들 태양볕이 없어서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류 씨는 현재 아내와 딸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잇고 있다. 그는 “가족들이 땅을 무료로 빌려주고 그곳에 작은 가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장사는 잘 안된다. 다행히 딸이 부양해주는 덕분에 먹고 살고 있다“고 했다.

류 씨에게 최근 희망이 생겼다. 지난달 말 자신이 만든 해시계가 현재 대통령 기록관에 소장돼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기록관에 보관된 해시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4년 미국 측 인사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회사 경영자였던 류 씨 지인 중에 미국 반도체 업체인 페어차일드 관계자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 페어차일드 관계자는 의미 있는 선물을 찾던 중 조선시대 해시계를 복원해 만든 류 씨의 해시계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류 씨는 귀한 선물로 쓰일 거라는 생각에 장미목을 깎아 받침대를 만들고 시곗바늘과 나침반도 손수 제작해 미국으로 보냈다. 이 시계가 한국 대통령 선물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통령 기록관 홈페이지
대통령 기록관 홈페이지

류 씨는 “지인이 ‘위키트리에서 기사를 봤는데, 대통령 선물이라는 해시계 그거 자네가 만든 거 아니냐’고 하더라. 기사를 보고 나서야 내가 만든 시계가 다시 고국으로, 그것도 대통령 선물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정말 뿌듯했다”고 말했다.

과거 류 씨가 했던 선행도 희망의 씨앗이 됐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고향 성당을 짓는 데 쓰라며 자신이 운영하던 시멘트 회사에서 시멘트를 기부한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당시 주임신부였던 사제는 현재 마산교구청 주교가 됐다.

류 씨는 “배기현 주교님과 해시계를 500만 원에 산다고 하셨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신 거다. 부자재를 살 돈이 없어 해시계를 못 만들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주신 돈으로 중국에서 급하게 바늘과 나침반을 구해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예산이 넉넉했을 때는 고급 시곗바늘과 나침반을 주문 제작해 해시계(왼쪽)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마산교구 주교의 도움으로 해시계(오른쪽)에 중국산 시곗바늘과 나침반을 끼울 수 있었다 / 이정은 기자
예산이 넉넉했을 때는 고급 시곗바늘과 나침반을 주문 제작해 해시계(왼쪽)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마산교구 주교의 도움으로 해시계(오른쪽)에 중국산 시곗바늘과 나침반을 끼울 수 있었다 / 이정은 기자

류 씨의 해시계 사랑에 미국에 사는 사촌들도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카에게 전화가 왔는데, 이웃들에게 고국에 대한 정도 느낄 겸 해시계를 선물하고 싶다고 하더라. 다시 해시계를 만들 길이 보이는 것 같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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