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피로해" 인맥 다이어트하는 청년들이 는다

2017-07-3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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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31)씨는 문자를 보낸 뒤 답이 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연락처에서 지웠다.

JTBC '비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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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때쯤, 대학교에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이 많았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까지 걸렸다. 그 상태에서는 뭘 결정할 수가 없어서 (주변 인간관계를) 다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국 출신 버스커 '안코드'가 최근 방송에 나와 한 말이다. 안코드는 당시 머리를 삭발하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6개월 동안 노숙을 했다고 밝혔다. 노숙하는 동안 주변 사람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도 했다. 안코드의 '인맥 리셋' 사례는 많은 사람들 공감을 샀다.

최근 이런 '인맥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체중을 줄이듯 주변 인맥을 정리해 줄이는 걸 뜻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곤함을 줄이기 위해서다.

'인맥 다이어트'를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단순히 SNS 팔로를 끊거나 상대 연락처를 삭제하는 방법부터 아예 휴대폰 번호를 바꾸거나 계정을 탈퇴하는 방법까지 있다.

SNS 친구만 몇천 명에 달했던 김 모(여·29) 씨는 최근 SNS 계정을 새로 만들었다. 그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소식을 매일매일 봐야 한다는 게 너무 피로했다. 새로 가입한 계정에는 정말 친한 친구 30명 정도랑만 친구를 맺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친구 숫자를 늘리는 데 집착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숫자는 관리해야 할 '짐'이 됐다. 너무 쉽게 끊어지는 인간관계에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정작 이 많은 사람 중에 힘들고 지칠 때 연락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허무하더라. 모두 정리하고 나니 후련하다"고 했다.

이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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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이 모(여·30) 씨는 '정기적으로'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와 SNS 계정을 탈퇴한다. 아예 연락처를 바꿔버리고 전화목록을 '0'으로 만들 때도 있다. 그야말로 '인맥 리셋'을 해버리는 셈이다. 이 씨는 "나도 모르는 새 친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관계를 거르려면 정기적인 탈퇴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주변 지인이 하나도 없으면 어떡하냐"는 질문에는 "연락처를 바꿔도 연락 올 사람들은 다 온다"고 답했다.

업무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박 모(남·31) 씨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문자를 보낸 뒤 상대에게 답이 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연락처에서 지웠다. 500여 명 중 3분의 1 수준만 남고 나머지는 다 삭제했다. "처음엔 상대 반응에 상처를 받거나 서운해질 때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간결해진 연락처만큼 내 생활도 심플해진 느낌이라 좋다"고 했다.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지난 4월 성인남녀 2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에 85%가 "있다"고 답했다. "인간관계를 일부러 정리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46%(1146명)가 "있다"고 답했다. "생각은 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는 답변도 18%를 차지했다.

인맥 다이어트를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원치 않는 타인에게 내 프로필을 공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31%로 가장 많았다. ‘내 진짜 관계(친구)를 찾아내기 위해(29%)’, ‘이름을 봐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23%)’라는 답변이 그 뒤를 이었다.

아예 일회성으로만 사람을 만나는, 이른바 '티슈 인맥'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자영업자 박 모(여·29) 씨는 "주말마다 여러 동호회에 한 번씩 가본다. 사람들이 괜찮으면 두 번까지는 가보지만, 그 이상은 절대 가지 않는다. 그냥 그날 만나서 놀고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니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편하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으로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소개팅을 하는 '점심팅'이 유행이다. 직장인 이 모(남·31) 씨는 "1~2시간 남짓의 점심시간을 활용하는 거라 부담이 적다. 한 번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끝이고, 좀 더 알고 싶으면 애프터를 신청하는 방식이라 효율적인 것 같다. 괜히 안 맞는 상대에게 돈과 시간을 써야 하는 리스크가 적어 좋다"고 했다.

외로움은 해소해주되 인맥 관리 부담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인 셈이다. 이 또한 '인맥 다이어트'와 연장선 상에 있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인맥 다이어트' 유행 원인에 대해 "집단주의 문화인 한국에서 인맥은 성공과 연결되는 중요한 자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SNS 확산으로 피상적 인간관계가 만연하면서 관계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또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드는 에너지 소모가 많다 보니, 젊은 세대에서는 혼밥, 혼술, 혼행 등 혼자 하는 문화가 유행하는 것도 이런 인맥 다이어트 현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맥 다이어트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 곽 교수는 "과도한 인맥 다이어트는 개인을 고립시킬 수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인간관계 리셋 증후군'을 앓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인간관계를 리셋하고, 차단해 버리는 현상이다. 이렇게 고립을 자처하는 개인들이 늘어나면 범죄 등 사회적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JTBC '비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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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교수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혼자 있는 시간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절한 인맥 다이어트는 인간관계로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여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표면적인 인간관계 보다는 나를 정말 잘 알고 이해해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지향하는 게 좋다"고 전했다.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