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자네들은 천국에 갈 것이다"

2017-08-1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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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3세인 민모 할아버지는 6년째 폐지를 주워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수집한 폐지를 정리하고 있는 민 어르신/이하 러블리페이퍼 제공
수집한 폐지를 정리하고 있는 민 어르신/이하 러블리페이퍼 제공

올해 83세인 민모 할아버지는 6년째 폐지를 주워 생활비를 벌고 있다. 자식이 둘 있지만 할아버지는 "부모는 내리사랑이다. 자식들에게 손을 내미는 게 참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80이 넘은 고령이지만 민 할아버지는 일을 쉴 수 없다. 부인 최씨는 귀가 아프다. 한쪽 귀에 생긴 심한 중이염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고름이 흘러나와 귀에 끼운 휴지를 아침저녁으로 갈아 줘야 한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위해 값싼 보청기를 장만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름이 흘러나오는 통에 보청기는 쓰지도 못했다. 그는 자녀들 삶도 넉넉하지 않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민 할아버지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민 할아버지가 비에 젖은 박스를 말리고 있다
민 할아버지가 비에 젖은 박스를 말리고 있다

◈ 시중 가격보다 10배 비싼 값으로 폐지 사는 청년들

민 할아버지의 '생활고'는 지난해 사회적 기업 '러블리페이퍼'를 만나고 조금 나아졌다.

러블리페이퍼는 폐지를 이용해 그림, 캘리그라피 같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 판매한 뒤 그 수익금 일부를 노인들에게 주는 사회적 기업이다. 예술 작품을 만들 폐지 대다수는 민 할아버지같은 노인들에게 구입한다. 러블리페이퍼는 노인들에게 폐지를 살때 시중 가격 10배를 준다.

러블리페이퍼는 지난해부터 월 1회 민 할아버지에게서 폐지를 구입하고 있다. 구입할 때마다 대략 4만원 정도를 폐지값으로 드린다. 폐지 구입과는 별도로 쌀, 생활용품 등을 함께 지원한다.

민 할아버지는 "박스 40장만 가져가도 러블리페이퍼는 2만 원을 준다. 일반 폐지 수집상에서는 꿈도 못 꿀 가격"이라고 했다.

폐지 가격은 날마다 바뀌지만 대략 킬로그램 당 120원~130원이다. 일반 수집상과 거래하면 17~18kg 정도 하는 박스 40장은 약 2000원 정도 한다. '러블리페이퍼'는 20배 가격에 사들이는 셈이다.

활짝 웃고 있는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
활짝 웃고 있는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

◈ 시중 가격보다 10배 비싼 값으로 폐지 사는 청년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는 기독교 대안학교 '푸른꿈비전스쿨' 교사다. 그가 폐지 줍는 노인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지난 2013년 6월이다. 폐지를 머리에 이고, 허리에 둘러메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노인을 본 게 계기였다. 그는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이라는 신념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기 대표는 2013년 12월 '굿 페이퍼'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여러 학교, 관공서 등과 협약을 맺었다. 협약 기관에서 폐지를 기증받아 수집상에게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어르신들을 도왔다.

하지만 널뛰는 폐지 가격이 문제였다. 폐지 가격이 내려가면 어르신들에게 돌아갈 기부금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폐지로 예술작품을 만들어 판매해보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 떠올랐다. 굿 페이퍼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들과 2016년 1월 '러블리 페이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문제는 폐지를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해줄 작가를 구하는 일이었다. 고심 끝에 같은 해 2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재능기부 해줄 작가를 모집했다. 4시간 만에 지원자 150명이 연락했다. 자원한 재능 기부자들과 모두 작업하기 위해 3개월로 계획했던 프로젝트가 1년으로 연장됐다. 폐지 작품에 대한 호응이 좋아 2017년 1월 사회적 기업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러블리페이퍼가 지금까지 판매한 폐지 작품은 80여개다. 이 돈으로 현재 민 할아버지를 비롯해 노인 7명을 돕고 있다. 직접 도움을 드리는 어르신들 외에도 소셜펀딩으로 모금한 100여 만원으로 노인 20명을 돕고 있다.

러블리페이퍼에서 폐지를 이용해 제작한 예술 작품들
러블리페이퍼에서 폐지를 이용해 제작한 예술 작품들

◈ 정서적 결핍까지 보듬는 노인 복지가 필요한 때

전국고물상연합회 등에 따르면 폐지 수거 노인은 약 170만 명 정도다. 65세 고령 인구 657만 명 중 4분의 1이 폐지로 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폭염과 혹한, 교통사고 위험 그리고 외로움과 맞서 싸우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 당 58.6명(2015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자살률(26.5명)의 2배다. 노인 빈곤율은 2016년 기준 47.7%다. 두 수치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소속 국가 중 1위다.

기우진 대표는 노인 복지가 '노인 삶 속으로 파고드는 복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정부 차원에서 폐지 수거 노인들 실태를 제대로 파악한 적이 없다고 했다. 기 대표에 따르면 170만 명이라는 조사 결과 역시 민간단체가 발표한 숫자일 뿐 정확하지 않다. 폐지 노인들 소득 수준과 생활 환경에 대한 조사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그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며 "우리가 이분들을 '폐지 줍는 빈곤 노인들'이라고 뭉뚱그려 바라보고 있었던게 아닌가 고민해야 한다"라고 했다.

러블리페이퍼에서 제작한 작품
러블리페이퍼에서 제작한 작품

기 대표는 '러블리페이퍼 프로젝트'를 시작해서야 폐지 줍는 노인들이 정말 다양한 이유로 거리에 나선다는 것을 깨알았다. 어떤 노인들은 생계비나 의료비를 위해 폐지 수거를 한다. 또다른 노인들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현금 벌이로 나선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다는 욕구가 나이가 든다고 줄어들지는 않는다.

기 대표는 "노인 복지를 단순히 의료지원, 생계지원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노인들의 남은 삶을 노동으로만 채우지 않도록, '정서적 결핍'까지 아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 할아버지는 러블리페이퍼 회원들이 고맙다. 그는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는다"며 "그렇지만 자네들은 천국에 갈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이들은 천국에 간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사는 게 정말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지원을 받아 좋다"며 "앞으로도 힘든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폐지로 만든 작품을 들고 웃고 있는 아이
폐지로 만든 작품을 들고 웃고 있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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