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행은 남의 돈으로" 구걸 여행객 핫플레이스 된 서울

2017-08-2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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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신촌, 홍대, 종로 등 도심가에서 베그 패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한 여행객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팔고 있다. / 이하 이순지 기자
슬로베니아에서 온 한 여행객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팔고 있다. / 이하 이순지 기자

지난 13일 직장인 나진수(남·39) 씨는 서울 홍대 '걷고 싶은 거리'를 지나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여성이 쭈그려 앉아 사진을 바닥에 펼쳐놓고 팔고 있는 모습을 봤다. 사진들 위에는 8절 스케치북 크기 종이가 놓여있었다. 종이에는 한글로 삐뚤삐뚤 이렇게 적혀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왔습니다. 저는 세계 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직접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진 가격은 2000원부터 마음대로 주세요."

나 씨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배낭여행 떠났던 추억이 떠올라 사진 2장을 1만 원에 샀다. 나 씨가 만난 여성은 소위 '베그 패커(Beg packer·구걸 여행자)'라 불린다. 사진이나 엽서를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서양 여행객을 말한다.

최근 서울 신촌, 홍대, 종로 등 도심가에서 베그 패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다음 나라는 OO입니다. 세계 여행을 도와주세요", "여행 경비가 부족해요", "여행을 위해서 사진 한 장 사주세요" 등 문구를 내세워 구걸한다.

러시아에서 온 커플이 지난 26일 서울 홍대에서 팔고 있던 사진
러시아에서 온 커플이 지난 26일 서울 홍대에서 팔고 있던 사진

홍대 거리에서 만난 러시아 여성 키라(23)는 "서양 여행객들 사이에서 사진을 팔아 경비를 마련하는 것이 유행이다. 1시간만 앉아 있어도 5만 원 이상을 팔 수 있다"고 했다. 실제 지난 26일 오후 7시부터 8시까지 키라를 살펴봤다. 약 15명이 사진을 사갔다. 구경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태국 등 동남아에서는 '베그 패커'가 이미 사회 문제가 됐다. 해외여행을 할 형편이 되는 이들이 가난한 현지인들을 속여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방콕 시내 관광지인 짜뚜짝 공원에서 젖먹이 딸을 데리고 구걸을 하는 서양인 여성 / 연합뉴스
방콕 시내 관광지인 짜뚜짝 공원에서 젖먹이 딸을 데리고 구걸을 하는 서양인 여성 / 연합뉴스

태국 이민당국은 외국인 구걸 행위가 문제가 되자 올해 중순부터 단속을 시작했다.

코코넛 방콕 등 태국 현지 매체에 따르면 서양인 관광객들은 1인당 2만 바트(약 67만 원) 이상 현금을 지니지 않으면 입국이 어려워졌다.

Thailand’s attempt to stop 'begpackers' and illegal workers: Visitors asked to show THB20,000 before entering the country

태국 등에서 단속이 심해지자 베그 패커들은 태국과 비슷한 '정(情)'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으로 최근 몰리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서울 명동에서 만난 러시아 남성 싸샤(남·24)는 "원래 태국에 갈 생각이었는데 그쪽에서는 뭘 팔 수가 없다. 친구들에게 정보를 얻어 한국으로 오게 됐다. 한국인들이 친절하다. 이렇게 엽서를 사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학교를 다니다 1년 전부터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직접 찍은 풍경 사진을 팔아 돈을 벌고 있었다.

싸샤는 여행 정보를 나누는 자국 커뮤니티에 한국 관련 글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셔터스톡
셔터스톡

서울 곳곳에서 여행 자금을 모으려고 구걸을 하는 서양인 여행객들이 늘면서 비난 여론도 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열정 있는 청년은 도와줘야 한다'는 한국 정서를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생 정진아(23) 씨는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뭘 팔고 있는 서양 여행객들을 보면 이것저것 샀던 것 같다"고 했다. 정 씨는 "최근 유튜브 등에서 이들과 관련된 얘기를 듣게 됐다. 한국이 가진 정(情) 문화를 이용하는 것 같다. 기분 나쁘다"고 비판했다.

여행 업계에서도 '베그 패커'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한 여행사 대표는 "지난해 우리나라에 입국한 외국인 관광객은 약 1323만 명이다. 아시아에서 인기 높은 여행지다"라면서 "사진을 파는 백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잘 거절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한다. 서양에서는 아주 질 나쁜 수법이라고 얘기한다. 없어져야 할 여행 방식"이라고 했다.

비판 여론이 일어도 국내에서는 관련 규정이 없다. 출입국관리국에 따르면 취업활동을 할 수 있는 체류 자격을 지니지 않으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다. 출입국관리법 제20조 위반으로 강제 출국 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베그 패커들의 경우 체류 자격 변경을 통해 취업 비자를 얻었더라도 노점 행위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베그 패커가 주로 활동하는 홍대, 신촌, 명동 등 관할 경찰서 관계자들은 "길바닥에서 허가없이 물건을 파는 것은 불법 상행위다. 조잡한 물건을 파는 외국인들을 보면 상대하지 않고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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