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사는 절대 후각? 축농증 걸린 사람도 있다” 조향사 장준영 씨 인터뷰

2017-09-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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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는 정말 절대 후각을 가졌을까. 직접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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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가즘'

서울 종로구 누하동 큰 길가에 위치한 향수 판매점 '로매지크(L'eau Magique)'에는 이런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 향을 맡는 코와 쾌락을 의미하는 오르가즘의 합성어다.

매장은 한 층당 16m²(5평) 남짓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는 4층 건물이었다. 서촌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골목길이지만 민트색 간판에 붙어있는 코 모양 심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가게로 들어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코를 매만졌다. 묵직한 우디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강한 향이었다. 가게 안쪽에는 50가지 정도 되는 향 베이스들이 일렬로 진열돼 있었다. 비커와 스포이트 같은 장비가 즐비했다. 화학실험실을 방불케 했다.

'로매지크'를 운영하는 조향사 장준영(36) 씨가 기자를 맞이했다. 장 씨는 즉석에서 향수를 만들어줬다. 향은 묵직하고 야했다. 가죽향에 진한 장미향이 가미된 듯했다. 장준영 씨는 "이 향은 조말론이나 딥티크 같은 니치향수 브랜드 홍보팀도 인정한 제품"이라며 "브랜드 관계자들이 주기적으로 들러 향을 시향하고 간다"고 자랑했다.

◈ "조향사는 타고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향수를 시향해보고 제조할 수 있는 작업실
향수를 시향해보고 제조할 수 있는 작업실

조향사는 '음식 향료'를 다루는 식품향료연구자(Flavorist)와 화장품을 다루는 향장품 연구자(Perfumer), 두 분야로 분류할 수 있다. 향수는 식물이나 동물에서 추출한 향인 에센셜 오일를 조합해 만든다. 에센셜 오일은 향 원료인 동식물을 끓이는 증류법, 압력을 이용하는 압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추출할 수 있다.

조향사는 이 에센셜 오일 자체를 만들거나 에센셜 오일을 적정한 비율로 조합해 새로운 향을 탄생시킨다. 수많은 향을 구별하며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조향사에게 후각은 매우 중요하다.

장준영 씨는 모든 조향사들이 '절대 후각'을 지닌 건 아니라고 했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고 했다.

장 씨 본인은 향 원료 300가지 정도를 코로 구분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향사들은 몇백에서 몇 천가지 향을 구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과 학습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향사들은 여러 향을 지속해서 맡아보고 향을 조합·보정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향을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해지는 거라고 한다.

가장 큰 자산인 '코(후각)'를 관리하는 비법에 대해 물었다. 놀랍게도 돌아온 대답은 "없다"였다. 그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는 것 외에 더 노력하지 않는다. 조향사 중에서는 비염이나 축농증 환자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 조향사에게 하늘 아래 같은 향은 없다

조향을 마친 향수를 병에 담고 있는 모습
조향을 마친 향수를 병에 담고 있는 모습

"어? 이거 조말X 향수랑 비슷해"

시중에는 특정 브랜드 향수가 인기를 끌면 이와 비슷한 향을 가진 향수가 차례로 출시된다. 향수에는 '특허권'이 없기 때문이다.

특허청 박정웅 사무관은 "향수에는 선행기술이라는 개념이 없다"면서 "특히 제품 효과 등을 증명할 수 없어 특허 등록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준영 씨는 조향사에게 있어 하늘 아래 같은 향은 없다고 했다. 그는 "조향사들은 고유의 레시피 또는 포뮬러로 향수를 만든다. 향이 아주 비슷한 향수라도 100% 같지는 않으며 자신만의 특이점(시그니처)을 표현해 기억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조향사는 에센셜 오일이 가진 미세한 차이까지 파악한다. 아무리 같은 비율의 에센셜 오일을 사용하더라도 향수 향이 다를 때가 있다. 이는 원료 상태가 습도나 기후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조향사의 예민한 코는 이런 미묘한 부분까지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 "우리나라 1세대 조향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교육 세대"

CJ 전신인 제일제당은 1980년대에 '향'에 대한 기술을 쌓으라며 사원들을 유럽에 파견했다. 우리나라 1세대 조향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향수가 대중적이지 않고 귀했던 시절이었다.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적었다. 향수 조향사에 대한 투자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많은 금전적 지원을 했지만 적자가 난다고 판단한 사측은 이 사업을 접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1세대 조향사들은 세제나 샴푸 등 생필품에 쓰이는 인공 향을 만드는 사업에 배치됐다. 향수 자체만을 위한 조향사는 맥이 끊긴 셈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문적인 조향사 양성 과정이 없다. 국가 자격증도 없다. 조향사가 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유명 전문 학교를 다니거나, 국내 아카데미 수료 후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본인이 직접 공부를 해야 한다.

조향에 관한 유명 해외 교육기관으로는 프랑스 ISIPSC와 일본 NIFFS가 있다. 두 곳 모두 졸업 후 취업률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프랑스 ISIPSC는 현지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해야 하며, 교육과정 또한 대학원 수준으로 어렵다. 또 일본 NIFFS는 일본 체류 비자가 있는 사람만 입학이 가능하다.

민간 자격증 발급을 담당하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조향사 관련 민간 자격증을 발급하는 곳은 16군데다. 최창래 전문원은 "'조향'이라는 분야가 트렌드에 영향을 받고 수요가 적어 국가 자격증보다는 민간자격증으로 운영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민간 자격증을 통해 조향사에 입문한다. 조향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원을 잘 알아보는 게 관건이다.

◈ 조향사? 만만하게 볼 직업이 아니다.

조향사 장준영 씨와 동생 신민재 씨
조향사 장준영 씨와 동생 신민재 씨

장준영 씨는 조향사가 되기 전 경기도 수원에서 헬스장을 운영했다. 그는 대학에서 사회체육과를 졸업한 뒤 전문 보디빌더 선수 생활을 했다. 미국, 태국 등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각 나라마다 고유 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향수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장준영 씨는 조향사가 된 게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전문적인 조향사를 키우는 양성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준영 씨는 독학으로 조향사가 됐다. 장 씨는 우리나라 1세대 조향사들 중 한 분을 어렵게 만나 조향 기술을 사사했다.

장 씨는 "향수 한 방울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원료와 노력이 투입된다"고 했다. 하지만 원료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생리라고 했다.

아주 적은 양의 에센스를 얻기 위해서 백 kg 단위 이상 원료를 구해야 하며 그 원료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도 필요하다. 조향 시장은 열정만 가지고 도전하기엔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장준영 씨에게 조향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부탁했다. 그는 "단지 향이 좋아서, 멋있어 보여서 이 일을 시작하지 말기를 바란다.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삶에 취하기보다 현실을 바로 보고 이 직업이 정말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home 박송이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