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사랑이 없다” 연애 세포 자랄 틈 없는 스무살 사연

2017-10-0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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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학년도 신입생이 된 후 마주한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이하 셔터스톡
이하 셔터스톡

서울 소재 대학 17학번인 스무 살 최모 양은 매일 아침 일찍 학교로 향한다. 늘 아침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동아리 4개를 소화하려면 남들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최 양은 “아침에 일찍 나와도 들어가는 시간은 늘 자정을 넘긴다. 고3 때보다 더 하다”고 말했다.

"연애하는 동기들 비율은 한 60명 중 10명도 안 된다"

"왜 연애를 안 해요?" 최 양은 마치 입안 가득 찹쌀떡이라도 문 사람처럼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최 양은 “아직은 남자친구 생길 때가 아니”라고 잘라 답했다.

최 양이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는 이유는 ‘인간관계’를 다지기 위해서다. 여기 ‘인간관계’에 남녀가 이성적으로 만나는 건 포함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인간관계’란 ‘취업할 때나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 때 나를 끌어주고 도움이 되는 관계’를 뜻한다.

다른 스무 살 대학 신입생 김모 양은 "선배들에게 ‘지금 남자친구를 만들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양 선배는 대학 4학년이었다. 김양은 “그런 말을 들었다. ‘손바닥 같은 남자를 만나면 나도 손바닥만 해 지고, 건물 같은 남자를 만나면 나도 건물만 해진다’고 했다. 지금은…. 나도 신입생이니까….”라고 말을 흐렸다.

“‘스무 살, 제일 예쁘고 멋질 때야. 연애해’라는 말 안 들어봤나요?”

또 다른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이 모 양은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이 양은 “별로 그런 말 안 하던데…”라고 중얼거렸다. 이 양은 “미팅이나 소개팅을 해주겠다는 선배가 없는 건 아니다. 딱히 나갈 마음이 없다”고 덧붙였다.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했다. 최 양는 “과(신문방송학)에 연애하는 애(신입생 동기)는 딱 한 커플이다. 몰래 하는 거면 몰라도”라고 했다. 최 씨는 “연애하는 동기들 비율은 한 60명 중 10명도 안 된다. 다들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 썸을 타도 시들시들, 고백은 NO

이날 만난 신입생들도 수험생 시절에는 ‘썸’을 타는 상상을 하며 버텨왔다. 벚꽃이 흩날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학교 잠바를 입고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던 상상 말이다.

2017학년도 신입생이 된 후 마주한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김 양은 "어떤 오빠와 만나서 밥 먹고 계속 연락하고 그랬다. 만날 수록 연애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언니들도 지금 남자 만날 때가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썸이 끝났다”고 말했다. 김 양은 학점 관리와 자기 계발, 대외 활동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스무 살 배모 군은 왕성한 혈기를 영어 공부에 쏟아붓고 있었다. 배 군은 이미 대학 시절을 겪은 사촌 형·누나들이 취업난에 시달리는 과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배 군은 "일찌감치 스펙을 쌓아두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며 "내게 호감을 가진 이성 친구가 있었지만, 시간을 많이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도 스무 살에겐 '연애 장벽'이 됐다. 이 양은 “돈도 든다. 연애 생각을 하면 만나서 영화 보는 데 얼마고 데이트 비용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당장 학교생활만 해도 빠듯한데 말이다”라고 털어놨다. 최 양은 “2학기부터 자취를 하고 있다. 자취방 월세에 동아리 회비, 식비도 모자라다. 그런데 굳이?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굳이 연애해야 하나? 나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 양은 “감정 소비가 싫다”고 말했다. 그는 “연애를 하면 상대방 때문에 하루 기분이 좌우된다고 하더라. 그럴까 봐 싫다”고 했다.

◈ 연애 = 사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수험생 시절, 대학만 가면 ‘할 거 하면서 즐길 거다’라던 호언장담은 무색해진 지 오래다. 입학 직후 취업난에 허덕이는 선배들을 본 신입생들은 ‘낭만은 사치’라고 입을 모았다.

최 양은 “대학은 천국이라고 동기 부여를 하면서 대학에 왔다. 막상 와보니 차라리 수험생 때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수험생 땐 수능만 공부하면 됐는데, 지금은 인간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고 그 와중에 학점까지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말을 점점 빨리하던 최 양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만약 상대방이 연예인처럼 엄청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이라면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을까? 최 양은 “드라마에서 박서준이 멋있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진짜 박서준을 빼닮은 남자가 나를 좋다 해도, (이 사람의) 미래를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누가 알까. 같은 처지인데”라고 말했다.

"언제쯤이 연애하기에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배 군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어렵게 입을 연 배 군은 "그런 건 잘 모르겠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배 군은 "일단 제가 세워둔 목표가 있잖느냐"며 "그게 우선인 것 같다"고 말을 줄였다.

◈ 감성보다 이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

전문가들은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앞세우는 게 요즘 사회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박수경 듀오 대표는 “요즘 미혼남녀 대부분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돈을 모으거나 사회적 안정감을 느낄 때 연애를 원한다. 실패 없이 사람을 만나려는 기질도 강하다. 안전한 연애, 나와 맞는 사람만 만나겠다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억눌러온 감정과 노력해온 시간이 쌓여 연애를 더욱 방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 대표는 “‘이렇게 애써온 결과물이 있는데, 결혼으로 고생하느니 차라리 혼자 살겠다’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가슴에 사랑이 없다” 스무 살에게 ‘연애’가 뒷전인 이유는

박 대표는 “연애 중인 사람, 특히 결혼을 전제로 연애 중인 사람은 행복지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다”며 “대학생들이 이런 행복을 사치 혹은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살지 못하는 첫 세대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입시부터 대학 생활, 취업, 사회생활까지 어렵다는 말들만 나오니 ‘연애는 미뤄야겠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말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 제공
결혼정보회사 '듀오' 제공

박 대표는 “우스갯말로 ‘6·25 전쟁통에도 사랑했고 아이도 태어났다’는 말처럼, 연애가 주는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 팍팍한 현실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맞춰 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삶을 즐기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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