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위험하다” 평창동 서울예고 앞 '육교 갈등'

2018-02-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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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학부모, 학생들은 입을 모아 “육교가 꼭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서울예고 앞 육교가 있던 자리 (현재 철거) / 권지혜 기자
서울예고 앞 육교가 있던 자리 (현재 철거) / 권지혜 기자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예고(서울예술고등학교) 앞. 학생들이 삼삼오오 학교를 빠져나왔다. 몇몇 학생은 커다란 악기 상자를 메고 있었다. 학생들은 정문 양옆 경사로에서 갈라진 다음 맞은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 불이 켜졌다. 천천히 내려오던 학생들이 갑자기 속력을 냈다. 신호가 깜빡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류장에 버스 두 대가 도착한 상태였다.

서울예고는 북악산 자락에 있다. 바로 앞은 5차선 평창문화로다. 1979년 서울예고 정문과 맞은편 인도를 연결하는 육교가 착공됐다. 육교 덕분에 학생들은 언덕을 내려가지 않고도 길을 건널 수 있었다. 서울예고 1학년 황주은 양은 "육교는 교문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종로구청은 2014년 4월부터 전문 업체에 지역 내 보도 육교 정밀 안전 진단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지역 내 육교 3곳 중 2곳이 D급 재난 위험 단계로 드러났다. 평창동 서울예고 앞 보도육교와 신영동 세검정초 앞 세검보도육교였다. 구청은 2015년 10월 두 육교를 재난위험시설로 고시했다. 이후 지난해 11월 두 육교를 철거하고 재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2018년 2월 현재 서울예고 학생들은 정문 옆 두 경사로로 통학하고 있다. 경사로에서 왼편 횡단 보도까지 120m, 오른편 횡단 보도까지 100m 거리다.

서울예고 앞 (파란 부분이 육교) / 네이버 지도
서울예고 앞 (파란 부분이 육교) / 네이버 지도

육교 재설치 작업을 두고 주민과 학교, 구청 간 갈등이 불거졌다. 일부 주민은 미관상 문제를 이유로 육교 설치를 반대했다.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북한산과 북악산 조망권을 해친다는 것이다. 예산에 대한 불만도 쏟아졌다. 종로구청에 따르면 평창동, 신영동 육교 철거와 설치를 위해 책정된 비용은 약 20억 5000만 원이다. (국비 10억 원, 시비 10억 5000만 원)

지난해 12월 평창동 주민 2000여 명이 육교 설치에 반대하는 서명을 냈다. 지난 9일에는 평창동 주민센터 앞에서 시위가 열렸다. '신영동·평창동 육교설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도 출범했다.

서울예고 측은 육교 재건을 주장하고 있다. 학교와 학부모, 학생들은 입을 모아 "육교가 꼭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 서울예고 "학생 안전이 최우선"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서울예고 건물 / 이하 권지혜 기자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서울예고 건물 / 이하 권지혜 기자
서울예고 정문 (육교로 통하던 문)
서울예고 정문 (육교로 통하던 문)

서울예고 원종혜 학생부장은 안전을 강조했다. 학생부장은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악기나 미술 도구를 들고 다닌다"라며 "첼로나 더블 베이스 같은 악기는 부피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술과 학생들은 일과 중에도 재료를 사러 다녀온다. 무용과 학생도 장구를 들고 다닌다"라고 덧붙였다.

학생부장은 "정문에 두 경사로가 있다. 비나 눈이 내리면 길이 바로 미끄럽게 변한다"라며 "몸 크기와 비슷한 악기를 들고 걷다 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육교가 가장 안전한 통학로"라고 주장했다.

서울예고에서 700m 정도 떨어진 세검정초 측 입장도 같다. 세검정초 관계자는 "육교가 꼭 필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관계자는 "학교 앞 도로가 굴곡과 경사가 있다. 운전할 때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다"라며 "육교를 없애고 횡단보도만 두면 학생들이 위험하고 운전자도 불편하다"라고 설명했다.

안현기 신영동·평창동 육교설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 대책위원장은 "학생들이 육교 아닌 길로는 어디도 다니지 못한다는 이야기인가"라고 반박했다. 안 위원장은 "나도 아이들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전 교육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쿨존과 감속 카메라 등 여러 제반 시설을 갖추면 되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교사들은 '안전 교육'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서울예고 학생부장 교사는 "당연히 학생들에게 무단 횡단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아무리 말해도 급한 상황이 닥치면 무단횡단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맞은편에서 오려면 길을 돌아 횡단보도로 와야 한다. 학생들은 단 몇 분이라도 지각하지 않으려고 뛴다"라며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담이 크다"라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정문 앞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한 적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예고 1학년 이준서 군은 "육교가 사라진 이후 무단횡단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걱정이 많다"라고 밝혔다. 이준서 군은 "우리 학교는 멀리서 통학하는 친구가 많다. 편의시설을 최대한 확보하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1학년 오채원 양도 "육교가 없어서 길을 돌아가야 한다. 무거운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이 특히 힘들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이수범 교수도 '서울예고 앞 보도육교 부근 교통 안전성 검토' 보고서에서 학생 무단횡단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교수는 "교통량이 적은 야간시간대 실습수업 후 하교하는 학생들이 버스 이용을 위해 무단횡단할 가능성이 높다. 비보호 좌회전 신호를 이용하는 교차로 때문에 사고 위험성도 커진다"라고 설명했다.

◈ "주민 무시" vs "서울예고 학생도 평창동 주민"

주민들은 육교가 "주민을 배려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말한다. 평창동 주민 유희진 씨는 육교가 "자원 낭비에 돈 낭비"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유 씨는 "서울예고 학생을 제외하면 육교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라며 "단지 학생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예산을 쓴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명분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안현기 육교설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 대책위원장도 육교가 "소수 특권층을 위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서울예고 측은 학교 학생과 평창동 주민을 분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서울예고 학생부장 교사는 "우리 학교는 전국 곳곳에서 학생이 모인다"라며 "지방 출신 학생은 평창동에서 자취나 하숙도 많이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인근 상권도 살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서울예고 최범철 교감은 "학교는 공공시설"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감은 "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이나 근처 등산로를 많이 이용한다. 학교 공연도 보러 온다. 학생들이 마을에 문화적, 경제적으로 기여한다"라고 말했다. 최 교감은 "주민과 대립하고 싶지 않다"라며 "토론회에서 자꾸 주민과 학교 양가 구도가 만들어져 안타까웠다"라고 밝혔다.

서울예고 전경
서울예고 전경

육교 건설이 노약자, 장애인 등 교통 약자 주민을 배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평창동 주민 전혜주(가명) 씨는 "부모님이 연세가 많다. 노인들이 어떻게 육교를 이용하나"라며 언성을 높였다.

종로구청 도로과 관계자는 "육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육교 건설에 찬성하는 주민 이주원(가명) 씨도 "연로한 사람은 횡단보도 신호가 다 될 때까지 못 걷는 경우가 많다. 육교가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 공청회 이후에도 갈등...청와대 청원 '맞불'

안현기 육교설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 대책위원장은 "종로구청이 주민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안 위원장은 "육교를 재설치하는 건 좋다. 주민 의견을 얼마나 반영했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구청 도로과 관계자는 주민 의견을 들으려 노력했다고 해명했다. 관계자는 "2015년 당시 육교 재설치 건에 관해 각 동주민센터를 통해 주민 설명회 소식을 알렸다.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최범철 서울예고 교감도 "여론 공청회 때 주민이 많이 안 나타났다. 예산을 다 정하고 육교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 의견이 불거졌다"라고 밝혔다.

안 위원장은 "구청이 공청회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 안 위원장은 "구정 이후 이슈를 키울 생각이다. 방송 출연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갈등은 효자동까지 번졌다. 지난 7일 한 종로구 주민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저희 동네 육교 설치 공사를 중단하고 횡단보도를 설치해주세요' 청원을 게재했다. 글쓴이는 "종로구청이 주민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독선적으로 육교 설치를 강행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서울예고 총학생회는 지난 8일 '맞불' 청원을 게시했다. 학생회는 청원에 '어린 학생들 안전을 육교로 지켜주세요'라는 제목을 달았다. 글쓴이는 "교통 법규를 무시하고 달리는 평창문화로에 안전한 육교를 설치해주세요. 어린아이, 학생, 보행 약자 안전보행권을 지켜주세요"라고 말했다. 청원은 15일 현재 동의 700명을 넘긴 상황이다.

총학생회는 자필 서명도 취합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예고 교사는 "1, 2학년 학생 501명이 서명에 동참했다"라고 밝혔다.

안녕하세요 서울예고 학생회 입니다. 현재 학교 앞 육교 재설치에 관한 문제로 인한 전달사항을 공지합니다 안녕하세요, 학생회장 유채연입니다. 아래 링크는 서울예고 앞 육교 재설치 국민청원입니다. 지금 평창동 주민...

서울예술고등학교 학생회에 의해 게시 됨 2018년 2월 12일 월요일

◈ "처음이 아니다" 서울 곳곳 '육교 전쟁'

육교는 1964년 서울 중구 퇴계로에 처음 등장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서울 곳곳에 육교가 건설됐다. 육교는 산업화 시대 상징으로 여겨졌다.

2000년대 들어 육교가 낙후한 시설물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일부 시민은 육교를 도시 미관을 방해하는 '흉물' 취급했다. '걷고 싶은 거리' 등 보행자 중심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육교를 철거했다. 서울시 통계정보에 따르면 2000년 서울 시내 육교는 248개였다. 지난해 162개로 대폭 줄었다.

일부 동네에서는 육교 철거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일었다. 서울예고 이전에는 양천구 신정동 금옥여고 앞 보도육교가 '뜨거운 감자'였다. 지난해 신정3동 마을계획단은 주민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돌렸다. 주민 중 64.3%가 육교 철거를 찬성했다. 학교 측과 학부모들은 철거를 반대했다. 양천구청은 보도육교를 보존하는 방안을 택했다.

종로구청은 안전을 기준으로 의사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도로과 관계자는 "반대하는 분과 찬성하는 분 모두 우리 구민이다"라며 "도시경관 저해 등 육교 설치가 불러오는 부정적인 측면도 인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다만 우리가 지향하는 최우선 가치는 '안전'이다. 안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기준으로 재설치 작업을 검토했다"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보행 약자 불편을 줄이려면 사회적 보살핌이 필요하다. 학생 등 보행 약자 입장에서 육교를 다시 설치하기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서울예고 1학년 김다현 양은 "학교가 100년 넘게 이어질 수도 있다. 학생들이 그 시간 동안 안전하게 통학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서울예고 앞 평창문화로
서울예고 앞 평창문화로
home 권지혜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