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입 다물면 돼”…명절이 악몽같은 친족성범죄 피해자들

2018-02-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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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 10명 중 1명이 친족이나 친인척에게 피해를 입는다.

이하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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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차오름 기자 = "가족이요? 전 그 사람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덕담을 나누고 웃음꽃을 피우는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부모나 삼촌, 사촌 등 '친족'에게 성범죄를 당했지만 '혈연관계'라는 멍에에 매여 신고조차 하지 못한 채 홀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 매년 발생하는 성범죄 피해자 10명 중 1명이 친족이나 친인척에게 피해를 입지만 이들 중 법적대응에 나서는 비율은 100명 중 4명 남짓에 불과하다.

◇친족 성범죄 100명 중 96명은 신고도 못 해…신고율 4.3%

"아직도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아요…."

직장인 이모씨(26·여)는 10년 가까이 집에서 혼자 명절을 보내고 있다. 이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4년 전, 추석을 맞아 찾은 큰집에서 4살 터울 이종사촌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기억 때문이다.

이씨에 따르면 이종사촌인 박모씨(30·당시 16살)는 안방에서 자고 있던 이씨에게 다가가 이씨의 가슴을 움켜잡거나 자신의 성기를 억지로 만지게 했다.

이씨는 당시 상황을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워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기억하면서 "벌레가 온몸을 더듬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점점 대담해진 박씨가 이씨의 속옷까지 벗기려 하자 이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박씨의 손길은 멈췄다.

몇 년 뒤 고등학생이 된 이씨는 박씨의 행동이 강제추행이었다는 것을 알게됐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씨는 "부모님에게 그 사람(박씨)이 한 행동을 털어놨지만 돌아온 대답은 '네가 용서해라'였다"며 "경찰서 앞까지 수 차례 찾아갔지만 차마 신고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친족으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한 사람은 이씨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추석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학교에 다니는 A씨(25·여)는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삼촌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털어놨다.

"자신을 성추행했던 성범죄자랑 매년 얼굴을 보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요?"라는 말과 함께 사연을 고백한 A씨는 "친가 삼촌이 저를 방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며 "이제 잊을 만도 한데 여전히 생생하다" "진짜 끔찍하고 볼 때마다 뭘 잡고서라도 후려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한다"고 말했다.

A씨도 뒤늦게 삼촌에게 당한 일을 부모에게 말했지만 "아빠도 옆에서 화도 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미안하다고만 하셨다"면서 "매년 참고 (큰집에) 내려가는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16 한국성폭력상담소상담통계'의 '친족성폭력 피해 세부통계'에 따르면 2016년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범죄 피해 1353건 중 가해자가 친족이나 친인척인 경우는 10.1%(137건)에 달했다.

친족에 의한 성범죄의 가해자로는 Δ친부 혹은 의부(33.5%)가 가장 많았고 Δ사촌(19.7%) Δ삼촌이나 친형제(15.3%)가 뒤를 이었다. 특히 친족 성범죄 피해자는 Δ7세 이하 유아(55.5%) Δ8~13세 유년기(49.9%)에 집중된 것으로 분석됐다.

피해 유형으로는 Δ강제추행(52.6%) Δ강간(32.8%)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피해 지속 기간은 Δ1년 이상 피해(21.8%) Δ5년 이상 피해(11.9%)로 나타났지만 경찰에 신고하거나 법적대응을 하는 경우는 4.3%에 그쳤다.

친족에게 성범죄를 당한 100명의 피해자 중 96명은 온전히 혼자서 상처를 감내하고 있는 셈이다.

페이스북 '대나무숲'에서 갈무리
페이스북 '대나무숲'에서 갈무리

◇성범죄 계속 느는데…'일베'선 '사촌인증' 몰카문화까지

문제는 친족이나 친인척에 의한 성범죄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집계한 친족성범죄 건수는 2016년 137건(10.1%)에서 2017년 143건(11.3%)으로 늘었다. 경찰청이 발표한 '친족간 성폭력범죄 검거 건수'도 Δ2014년 624건 Δ2015년 676건 Δ2016년 725건으로 2년 사이 100건가량 증가한 수치를 나타냈다.

특히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을 맞아 방문한 친인척 여성의 뒷모습이나 은밀한 부위를 몰래 찍어 게시글로 올리는 이른바 '사촌 인증'이 수년간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가 대표적이다. 명절을 맞아 큰집을 찾은 여성 친인척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누워 쉬고 있거나 잠을 자는 모습을 '일베 인증' 손동작과 함께 찍어 게시글로 올리는 방식이다.

당연히 게시글에는 음담패설이 섞인 댓글들이 달릴 수 밖에 없다. 지난 2016년 추석을 맞아 큰집을 찾았던 B씨(21·여)도 사촌 오빠에게 '도촬'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보고 내 몸이 도촬됐다는 것을 알았다"는 B씨는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음담패설이 수백개나 달려있었다"면서 "모멸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호소했다.

B씨는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했지만 게시글을 지우겠다는 사촌오빠의 약속을 듣고 그 선에서 멈췄다"면서도 "이후 사촌오빠가 더는 가족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번지는 '사촌 인증'을 "명백한 범죄이고 심한 경우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비행문화"라고 잘라 말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가 자신의 도촬사진이 인터넷에 게시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한 수치심과 배신감, 누군가 나를 성적으로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트라우마가 복합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에 게시된 '사촌 인증' 게시글 캡쳐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에 게시된 '사촌 인증' 게시글 캡쳐

◇전문가 "대표적인 '암수범죄'…피해자 보호 방안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암수범죄'로 분류되는 친족성범죄의 특성상 겉으로 드러난 범죄보다 더 많은 친족성범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확실하고 장기적인 피해자 보호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암수범죄란 범죄가 실제로 발생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신고하기를 꺼려 공식적인 범죄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범죄를 말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어렵게 피해를 고백하더라도 피해자가 불이익을 받거나 되려 명예훼손으로 역고소까지 당하는 일이 빈번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소장은 최근 서지현 검사와 임은정 부부장 검사가 잇달아 검찰 내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면서 번진 '#미투(ME TOO)'운동을 들면서 "사회 깊이 뿌리박혀있는 성범죄에 대한 통념과 성범죄 피해자를 바라보는 잘못된 인권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효과적인 성범죄 예방과 피해자 치유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권익센터장도 친족간 성범죄 피해자들이 제대로 피해를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피해를 고백해도 오히려 사건을 덮으려고 하거나 가해자를 감싸는 가족들의 태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며 "피해자는 가해자가 대면한 채 생활할 수밖에 없다"고 심각성을 설명했다.

이 센터장은 "친족간의 성범죄는 보통 아동기에 벌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일이 범죄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칠 때마다 충격이 다시 오기도 한다"며 "상처를 혼자 감내하지 말고 상담센터를 찾아 피해를 털어놓고 외부 기관의 조력을 받아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이 좋다"고 당부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친족 성범죄의 경우 믿었던 가족에게 2차, 3차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너만 입 다물면 가족이 유지된다'는 식으로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한국의 정서가 문제"라면서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친모가 오히려 계부의 편을 들면서 발생하는 2차 피해로 후유증이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김재봉 한양대학교 로스쿨 교수는 실제 범죄피해보다 신고율이 현격히 낮은 현상을 '구조적 문제'로 풀이했다. 김 교수는 "친족간 성범죄는 성폭력 특례법에 따라 과거부터 친고죄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다"면서도 "친족간 성범죄는 주로 부모나 형제에게 피해를 입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상 피해자가 피해를 털어놓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특히 "아동기에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더라도 피해자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금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신고를 주저하는 큰 요인이 된다"며 "가해자의 친권을 제한하거나 더욱 강하게 처벌하도록 규정을 보완하고, 피해자를 장기간에 걸쳐 지원하고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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