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09번과 비교 싫어요”... '삼청동 애증의 존재' 종로11번 마을버스

2018-03-0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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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11번은 삼청동을 오가는 승객들과 운전기사 김 씨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달리는 버스였다.

서울 삼청동에서 승객들을 태우는 종로11번 마을버스 / 이하 손기영 기자
서울 삼청동에서 승객들을 태우는 종로11번 마을버스 / 이하 손기영 기자

청와대 출입기자 윤모(36) 씨는 '종로11번' 마을버스 이야기를 하면 혀를 내두른다. 키 190cm, 체중 100kg이 넘는 우람한 체격을 가진 윤 기자는 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청와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으로 출근한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춘추관으로 갈 때 그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종로11번이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5호선 광화문역에서 서울 삼청동 부근 춘추관으로 가는 버스 노선은 종로11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 종로11번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다. 15인승 소형 버스(현대차 카운티)에 삼청동 일대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탑승하기 때문이다.

윤 기자는 "버스가 작아 덩치가 있고 키 큰 사람은 목을 아래로 구부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며 "몇 명만 타도 금방 차안이 꽉 차고 숨 쉬는 것도 힘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윤 기자는 종로11번을 계속 타겠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것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택시를 타려니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 미워만 할 수 없는 종로11번 마을버스

경복궁에서 일하는 김모(여·50) 씨는 종로11번 이야기를 꺼내자 "얘(종로11번)는 너무 자주 오지 않는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종로09번 마을버스와 비교했다. 김 씨는 "출근 시간에 종로09번이 3대 정도 지나가야 겨우 얘가 온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김 씨는 "광화문역에서 경복궁 동문까지 멀진 않지만, 출근 시간 걸어가자니 마음이 급해 이 버스를 탈 수 밖에 없다"며 "얘는 매일 아침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만 마냥 미워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얘는 한마디로 애증의 존재"라고 했다.

승객들로 꽉 찬 종로11번 마을버스
승객들로 꽉 찬 종로11번 마을버스

종로11번은 1993년 첫 운행을 시작했다. 삼청동 일대 동네 주민, 청와대 출입기자, 경복궁·국립민속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직원과 관광객, 정독도서관 방문객이 주로 이 버스를 이용한다.

종로 11번은 기점이자 종점인 삼청공원을 출발해 금융연수원, 삼청동주민센터(청와대 춘추관),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세종문화회관(광화문역), 시청역, 서울역 등을 운행한다. 서울역 부근에서 회차해 남대문, 프레스센터(시청역), 광화문 KT 본사(광화문역), 정독도서관 등을 거쳐 삼청공원으로 돌아온다.

종로11번은 출·퇴근 시간 때 몸을 비집고 타야 하는 '만원 버스'가 된다. 배차간격도 평균 10분으로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그러나 삼청동으로 가는 유일한 버스 노선이어서 승객들은 종로11번을 '울며 겨자 먹기'로 타고 있다. 불편하지만 때론 고마운 이른바 '애증의 존재'다.

◈ "부러워"... 종로09번 마을버스와 비교되기도

종로11번 마을버스는 종종 종로09번 마을버스와 비교된다. 종로09번은 기점이자 종점인 수성동계곡을 출발해 한아름슈퍼, 통인시장, 경복궁역 등을 거쳐 시청역에서 회차를 한다. 현장에서 만난 종로11번 승객들은 한목소리로 종로09번이 더 자주 오고, 덜 붐빈다고 했다.

종로11번과 종로09번은 시청역~광화문역 구간에서 운행 구간이 겹친다. 광화문 KT본사(광화문역) 정류장 바닥에는 종로11번, 종로09번 탑승 위치를 구분하는 표시도 있다. 이곳에서 종로11번 승객들은 금세 줄이 빠지고 덜 혼잡한 종로09번을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광화문 KT 본사 버스정류장에는 종로11번과 종로09번 마을버스를 각각 탈 수 있는 승차 표시가 있다
광화문 KT 본사 버스정류장에는 종로11번과 종로09번 마을버스를 각각 탈 수 있는 승차 표시가 있다

종로11번과 종로09번은 생김새도 비슷하다. 두 버스 모두 같은 차종의 15인승 소형버스(현대차 카운티)를 운행한다. 태어난 연도를 비교하면 종로09번이 3년 늦은 1996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한 종로11번 승객은 종로09번에 대해 "형보다 나은 쌍둥이 동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두 버스의 '부모'는 같지 않다. 종로11번은 삼청교통, 종로09번은 인왕교통에서 각각 운행한다.

승객들 사이에서 종로11번은 종로09번에 비해 자주 오지 않고 사람도 많은 '불편한 버스'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종로11번은 종로09번에 비해 운행거리가 길다. 종로11번은 8.6km, 종로09번은 6.4km다. 배차간격도 종로11번은 평균 10분, 종로09번은 평균 8분이다.

종로11번은 종로09번에 비해 상대적으로 혼잡한 구간을 달린다. 종로11번은 관공서·관광지가 밀집한 서울 삼청동, 경복궁 일대를 운행한다. 평소 출·퇴근 시간 직장인 승객이 몰리고 관광버스, 관광지로 향하는 자가용으로 도로가 붐비는 곳이다.

반면 종로09번은 종로11번과 운행구간이 겹치는 시청역~광화문역 구간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한산한 서울 통인동, 옥인동 주택가 도로를 운행한다.

승객들 사이에서 종로11번 마을버스와 비교되는 종로09번 마을버스
승객들 사이에서 종로11번 마을버스와 비교되는 종로09번 마을버스

◈ 종로11번 기사 "종로09번과 비교하면 속상해"

종로11번 운전기사 김모(63) 씨는 종로09번과 비교될 때 속상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김 씨는 "이 버스회사에 처음 왔을 때 승객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왜 종로09번은 3대가 지나가는데 이건 1대밖에 안 오냐'였다"며 "그때 속상한 마음에 '그러면 그 버스 타시지 그랬어요'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말까지는 못 하겠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요즘도 승객들이 종종 종로09번과 비교를 한다. 여전히 속상하고 할 말이 많다"며 "종로11번과 종로09번은 노선 길이부터 다르다. 종로 11번이 더 길다. 종로09번은 주로 주택가를 달린다. 종로11번은 관광지와 관공서가 있는 경복궁, 삼청동을 운행한다. 도로 혼잡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했다.

김 씨는 "노선 1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0분 정도다. 도로가 막히면 1시간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릴 때도 있다. 그래서 종로11번이 종로09번보다 더 안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며 "우리와 전혀 관련 없는 노선과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종로11번 마을버스 기사 김모 씨
종로11번 마을버스 기사 김모 씨

김 씨는 종로11번을 운행하는 삼청교통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팀장급 운전기사'였다. 김 씨는 버스 대수를 늘리거나 크기가 더 큰 버스로 교체해달라는 일부 승객들 요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김 씨는 "출·퇴근 시간 때 이 버스가 붐비는 모습만 본 승객들은 놀랄 수도 있지만 사실 종로11번은 적자 노선"이라며 "출·퇴근 이외 시간에는 승객이 거의 없다. 쉬운 말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노선이다. 마을버스는 개인회사가 운영하지만 일종의 공익사업이기 때문에 서울시가 적자 분을 보전해주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경제 논리도 따져야 하기 때문에 증차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큰 버스로 바꾸는 문제도 마찬가지"라며 "이런 속사정을 승객들이 알 리가 없다. 물론 일부러 알릴 필요도 없다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종로11번 마을버스에 사람이 많을 때는 버스 운전석 부근 엔진룸 위를 좌석처럼 사용한다
종로11번 마을버스에 사람이 많을 때는 버스 운전석 부근 엔진룸 위를 좌석처럼 사용한다

◈ 운전기사에게도 종로11번은 '애증의 존재'

운전기사 김 씨에게도 종로11번은 '애증의 존재'였다. 김 씨는 '적자 노선' 마을버스 회사에서 일하면서 박봉을 받고 있었다. 김 씨는 "서울 마을버스 최저수준인 월 200만 원 정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도로를 달리는 시내버스를 부럽게 바라봤다. 종로11번 승객들이 종로09번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김 씨는 "솔직히 마을버스나 시내버스나 하는 일은 비슷하다. 긴 노선을 2~3번 운전하는 것이나 짧은 노선은 여러 번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시내버스 기사는 우리보다 페이(임금)가 좋다"며 "시내버스는 운전기사 시트에 완충장치가 잘 돼 있어 오래 운전해도 편하다. 그런데 우리 버스는 작은 충격도 그대로 전달된다. 승차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차"라고 말했다.

그래도 김 씨는 종로11번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행복하다고 했다.

김 씨는 "과거 20년 가까이 일반 회사를 다녔다. 매달 목표가 있으니까 그걸 달성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며 "그러다가 IMF 때 '황퇴(황당한 퇴직)'를 당했다. 한동안 이것저것 하다가 종로11번 마을버스 회사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일반 회사 다닐 때와 달리 여기는 정신적으로 너무 편하다"며 "회사 사장님이 업무에 들어가면 운전기사에게 잔소리나 간섭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종로11번은 삼청동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종로11번은 삼청동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적자 노선' 종로11번 마을버스가 언제까지 삼청동 도로를 달릴지 알 수 없다. 과거 삼청동 일대를 누빈 시내버스가 있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종로11번은 삼청동을 오가는 승객들과 운전기사 김 씨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달리는 버스였다. 갑자기 없어지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가족'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삼청동 근처 직장에 다니는 임모(38) 씨는 "삼청동으로 가는 유일한 버스 종로11번이 철수하면 끔찍할 것 같다"며 "불편한 점도 있지만 있을 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종로11번 운전기사 김 씨는 "솔직히 먹고 사는 게 넉넉하지는 않다"며 "그러나 만약 이 버스가 없어지면 '황퇴' 뒤 어렵게 찾은 희망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home 손기영 기자 sk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