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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조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10가지

    • • 6. 비록 적이지만 관우를 흠모했다.
    영화 '적벽대전' 스틸컷


    지난해 중국 허난성에서 위나라 시조 조조(曹操)의 무덤이 확인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발견된 무덤은 허난성 안양현 안펑향 시가오쉐촌 동한시대 무덤군에 위치해 있다. 발굴팀은 조조와 부인 류씨와 변씨 유해도 나왔다고 발표했다.

    중국 허난성의 평원지대에서 발견된 고분이 삼국지 위나라의 시조인 조조의 묘로 최종 확인됐다.



    중국 당국은 조조의 무덤이 맞다고 결론내렸지만 진위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2009년에도 허난성 문물국은 해당 고릉이 진짜 조조 무덤이 맞다고 발표했지만 생전에 칭한 적 없던 '위 무왕'이라는 호칭이 발견된 점이라든가 일부 문자는 당시 무덤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점이 문제가 됐다.

    조조 무덤으로 발표된 허난성 안양현 무덤군 / 연합뉴스


    조조는 위·촉·오 '삼국시대' 주역으로서 우리에게는 '삼국지' 주요 인물로 친숙하다.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 조조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갈리고 있다. 조조는 뛰어난 영웅일까, 아니면 간악한 모략가일까. 여기 조조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들을 정리해봤다. 


    1. 환관 집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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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는 원래 한나라 개국공신인 하후영 후손 하후씨 집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식이 없던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같이 조씨가 됐다. 당시 환관과 외척이 정세를 좌우하던 시기였던 터라 조등도 이 사이에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다. 

    그 덕에 조조는 일찍 출세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환관의 손자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런 집안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조조는 지방 호족들을 끌어들여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2.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출신 상관없이 과감하게 등용했다.

    이하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 스틸컷


    진림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진림은 조조와 라이벌이었던 원소 밑에서 문인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원소 명령을 받고 조조를 욕하는 글을 썼는데, 조조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욕했다. 

    조조는 이 격문을 받고 매우 분노하면서도 진림의 문장력을 보고는 감탄했다. 원소가 패한 후 진림이 조조 앞으로 끌려나오자 조조가 진림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조부까지 3대를 욕했는가?"
    "화살이 이미 활을 떠났기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진림 대답에 조조는 웃으며 더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그를 비서관으로 삼았다.

    조조는 자신을 배반했던 여러 부하장수들을 너그러이 용서한 일화들도 많다. 라이벌인 원소에게서 얻은 전리품 중에는 원소와 내통하고 있던 조조의 부하가 쓴 편지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하는 건 나 자친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라며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


    3. '계륵'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후한서"의 '양수전'에 따르면 조조는 촉나라 유비와 한중을 놓고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는 진격해야 할지 퇴각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늦은 밤 하후돈이 찾아와 암구호를 무엇으로 정해야 하냐고 묻자 조조는 "계륵"이라고만 할 뿐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후돈이 돌아가 장수들과 '계륵'이 무슨 뜻인지 논의하고 있을 때 조조 부하였던 양수가 짐을 꾸리며 말했다.

    "닭갈비는 먹을 만한 살이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위다. 결국 이 장소를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돌아갈 결정이 내릴 것이다."

    양수 말대로 조조는 다음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다만 조조는 양수에 대해 감히 속마음을 읽은 괘씸죄로 "군율을 어지럽혔다"며 참형에 처했다.


    4.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

    '삼국연의'에 따르면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고 조조를 불러들이려 하자 조조는 이름을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아버지 친구였던 '여백사' 집에 몸을 의탁했다. 

    여백사는 조조에게 편한 잠자리를 제공했다. 조조는 누워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칼 가는 소리에 여백사가 배신했다고 여겨 밖으로 나가 그의 식솔들 8명을 단칼에 베어죽였다. 

    사실 여백사 식솔들은 돼지를 잡아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 칼을 갈던 중이었다. 조조는 도망치던 중 술을 들고 오던 여백사와 마주치고, 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여백사마저 죽인다. 부하가 놀라 왜 그러냐고 묻자 조조는 "내가 세상을 버릴지라도 세상이 날 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돼 있다. 여백사 가족들이 먼저 조조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으려 해 죽였다는 기록(위서)도 있다. 아예 실존하지 않는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5.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이유는 전염병 때문이다.

    영화 '적벽대전' 스틸컷


    적벽대전은 조조군과 유비·손권 연합군이 장강 적벽에서 치렀던 유명한 전투를 말한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조조의 압승이 예상되는 싸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조조는 대패했다.  

    소설 '삼국연의'에는 제갈공명이 천재성을 발휘해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이 부는 것을 예상해 화공(불공격)을 제안했고, 그의 말을 듣고 주유가 황개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 화공을 써 조조군을 이겼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 편에서는 "큰 역병이 일어나 관리와 병사들 중에 죽은 자가 많아서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는 구절이 있다. 조조가 패한 핵심 원인은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불은 조조가 스스로 진영에 지르고 물러났다고 나온다. 


    6. 비록 적이지만 관우를 흠모했다.

    중화TV '제왕을 꿈꾼 남자 - 조조'


    조조는 관우를 훌륭한 명장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차례 관우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유비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끝내 조조 밑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조조는 그런 태도마저 훌륭하다며 극찬했다. 여포가 타고 다니던 말 적토마를 관우에게 선물로 준 것도 조조였다.

    조조와 관우는 서로를 한 번씩 살려준 적도 있다. 관우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을 포위당했을 때 유비의 두 부인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후 관우는 백마 전투에서 조조를 위해 원소 부하인 안량과 문추를 베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조조를 떠난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화용도를 지날 때 매복하고 있던 관우가 나타나 조조를 사로잡는다. 조조는 과거에 베풀었던 정에 호소하며 목숨을 구걸했고 결국 관우는 조조를 풀어준다. 관우는 이 일로 제갈공명에게 크게 문책당한다.


    7. 여색을 밝혔다.

    영화 '조조 - 황제의 반란' 스틸컷


    관우를 좋아했던 조조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양보한 것은 아니다. 유비가 조조와 함께 여포를 포위했을 때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관우는 여포의 장수 중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고, 관우는 이후에도 몇 번 더 찾아와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관우가 그토록 당부하는 진의록의 처가 궁금해 알아보기로 했다.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알자 조조는 그를 첩으로 삼았다. 그는 나중에 조조의 후궁인 두부인(杜夫人)이 된다.

    조조는 여색 때문에 자식을 잃기도 했다. 적장 장제가 죽고 그 미망인을 조조가 억지로 취하자 장제의 조카 장수는 격분해 조조를 암습한다. 이 과정에서 아들 조앙이 죽고 조조는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다. 조앙을 친아들처럼 사랑했던 정부인은 슬퍼하며 조조를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이혼 위기를 맞는다.    

    조조는 평생 정실부인 2명과 첩 13명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자녀 34명을 낳았다. 부인들 중 절반 정도가 원래 다른 사람 부인이었다.


    8. 뛰어난 문장가였다.

    영화 '적벽대전' 스틸컷


    조조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장수이면서도 시인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당시 백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알려진다. 그 중 하나가 '효리행'이다.

    투구 갑옷 속에는 이가 끓고/만백성은 죽어만 가네

    백골은 이슬에 젖어 들녘에 나뒹굴고/천리 안에 닭울음도 들리지 않는구나

    산 백성은 백에 하나쯤인가?/생각하면 할수록 창자가 끊어지는구나.



    조조 정권 시기 후한과 위나라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전해졌다. 그들의 문예활동을 당시 후한 헌제 연호를 따서 '건안문학'이라고 부르고 가장 출중했던 7명 문인들을 '건안칠자'라고 부른다.


    9.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 스틸컷 


    조조는 위나라 시조이지만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원소를 물리치고 서기 207년 중국 대부분 영토를 통일한 조조는 다음해 승상에 오른다. 213년 후한 헌제가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뒤이어 216년 위왕(魏王)에 임명하면서 조조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조조는 아들 조비가 220년 헌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은 후 태조 무황제로 추존된다. 그해 1월 조조는 임종을 맞으며 측근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묘지를 호화롭게 꾸미지 말라." 하지만 조비는 화려하고 웅장한 장례를 치렀고, 이후 도굴을 염려해 무덤 옆 건축물을 철거한다. 

    일설에서는 조조가 도굴을 걱정해 가짜무덤을 72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하지만 평소 근검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조 성격에 비추어 보면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10.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나온다.

    최근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전에는 소설 '삼국연의'를 바탕으로 조조가 악인으로 그려지고 유비-관우-장비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조가 주인공인 대중문화 컨텐츠가 많이 나오는 추세다. 그 중에는 2010년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과 2014년 중화TV 드라마 '조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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