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엄친아들” 조선시대 미남으로 기록된 인물 10선

2018-12-2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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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키가 작았던 미남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사극을 보다 보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실제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서에는 보통 남성 외모에 대한 평가는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외모보다는 인격이나 업적에 대한 평이 더 고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런 중에서도 외모 평이 이례적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은 있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살았던 인물 중 외모가 걸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들을 손꼽아 정리해봤다. 온갖 사서를 뒤져가며 실제로 기록이 있는 경우만 추려봤다. 능력도 뛰어났지만 외모는 더 빛을 발했던 '미남' 열 명을 지금부터 살펴보자.

1. 정약용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렸다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라는 뜻으로 '삼미(三眉)'라는 별명이 생겼다. 최근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서준희 역을 맡은 배우 정해인 씨가 다산 정약용의 6대 후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산의 외모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정해인 인스타그램
정해인 인스타그램

아쉽게도 다산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1974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다산 초상화는 월전 장우성이 그린 창작품으로 알려졌다. 2009년 강진군청은 기록과 직계후손들 얼굴을 참고해 영정을 제작해 발표했다. 위키백과에 실린 '정약용선생초상'이라는 작품은 진위 논란이 있다.

(왼쪽부터) 위키백과 / 월전 장우성 다산 초상화 / 강진구청이 제작한 다산 영정
(왼쪽부터) 위키백과 / 월전 장우성 다산 초상화 / 강진구청이 제작한 다산 영정

정조는 정약전과 정약용에 대해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고 말한 적 있다. (다산시문집 제15권 선중씨의 묘지명)

정약전은 실제로 호탕한 성격이라 시정 잡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정약용이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대로 정약용은 서책과 토론을 즐겼기에 지금으로 따지면 꽃미모를 가진 하얗고 조용한 선비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다산은 항상 "나의 정신이나 모습 대부분 외가에서 받았다"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다. 다산의 외증조였던 공재 윤두서 자화상을 보면 눈매가 부리부리하다. 정약용이 윤두서의 큰 눈매를 닮았다면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해보자.

2. 정조

이하 MBC '이산'
이하 MBC '이산'

정약용을 끔찍히 아낀 정조는 조선시대 왕 중에서도 문무를 골고루 겸비한 왕이었다고 알려진다. 신하들이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호통치기 일쑤였고 활쏘기에도 능해 신하들과 종종 내기하기도 했다.

정조 표준영정 / 위키백과
정조 표준영정 / 위키백과

정조가 쓴 일기 '일성록'에 따르면 손자를 아꼈던 영조는 정조의 외모를 칭찬했던 구절이 있다.

영조가 "세손은 온축된 생각이 있고 면모도 자못 전과는 달라졌다"고 하니 홍봉한이 "점점 더 나아짐을 느낀다. 사람 중에는 어렸을 때는 말랐지만 장성해서는 건장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좋은 징조"라고 말했다. 이창의는 "세손은 타고난 용모가 탁월하니 이는 국가의 무궁한 복"이라고 덧붙였다. (영조 36년 3월 20일)

3. 홍국영

홍국영은 정조 세손 시절에 노론 벽파로부터 정조를 보호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젊은 나이에도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정조 친모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홍국영에 대해 "잘생기고 말을 잘해서 내 아들을 홀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에 따르면 과거 합격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력이 나쁜 영조가 홍국영의 외모를 묻자 승지가 "매우 준수하다"라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영조 48년 9얼 21일) 야사에 따르면 홍국영은 시와 노래에도 능해 기녀는 물론, 아녀자도 적지 않게 따랐다고 전해진다.

정조 초기 최고 권세가였던 홍국영은 야심을 부리다가 결국 정조에게 버림받는다. 탕평책을 쓰려는 정조와 달리 자기 세력만 키우려고 하고 심지어 자신의 처소를 궁 안으로 들이는 등 오만한 행동을 자처했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였다가 여동생이 일찍 죽자 이를 왕후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고 중전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다. 횡성과 강릉 등 유배를 떠난 홍국영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을 가까이 하다 33세 젊은 나이에 죽는다.

4. 김홍도

SBS '바람의 화원'
SBS '바람의 화원'
단원 김홍도 자화상 / 위키백과
단원 김홍도 자화상 / 위키백과

단원 김홍도 역시 정조가 아꼈던 인물로, 뛰어난 화가이면서도 훈남이었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고 했다.

조희룡은 김홍도의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다고 기록한다. "훤칠하니 키가 커서 속세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도 하고, "멀리서 대하면 신선이요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다"라며 "군자의 모습"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5. 효명세자(익종)

KBS2 '구르미 그린 달빛'
KBS2 '구르미 그린 달빛'

순조 아들인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젊은 나이에 일찍 순조가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총명했고, 외모도 정조를 닮았다는 기록이 있어 만약 왕위에 올랐다면 정조만큼 뛰어난 왕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인물이다.

순조실록에는 "세자는 이마가 볼록 나온 귀상(貴相)에다 용의 눈동자를 하고 있어 그 전체적인 모습이 아주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므로 궁궐 안 모두가 말하기를 '정조와 흡사하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순조 30년 7월 15일 3번째 기사)

6. 문종

KBS2 '대왕 세종'
KBS2 '대왕 세종'

문종 역시 조선시대 왕 중에서는 잘생긴 왕으로 자주 손꼽힌다. 세종대왕 시절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다가 당시 세자였던 문종을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문종은 당시 나이 겨우 10세 였지만 "용모가 옥처럼 부드럽고 예절에 맞지 않은 게 없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세종 5권 8월 22일 4번째 기사)

'용재총화'에는 "예겸과 사마 두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세자인 문종께서 마중하시는 걸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이 아름답고 수염이 길어서 남자다움이 보통이 아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에는 삼국지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문종은 세자 시절 아내가 두 번이나 바뀔 정도로 처복이 없었던 걸로 전해진다. 세종의 장자답게 학문을 좋아하고 똑똑했지만 부모님이 골라준 아내는 성에 차지 않은 듯 보인다. 결국 문종과 사이가 좋은 후궁 권씨가 세자빈으로 올랐지만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그 뒤로 문종은 왕비를 두지 않았다.

7. 구성군(귀성군) 이준

MBC '한 번 더 해피엔딩'
MBC '한 번 더 해피엔딩'

구성군 이준은 세종의 네 번째 아들인 임영대군 아들로,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는 조카가 된다. 워낙 꽃미남이라 세조 재위 시절 세조 후궁이었던 덕중(소용 박씨)이 한 눈에 반해 러브레터를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러브레터를 받은 구성군은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임영대군은 아들과 함께 곧바로 세조에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세조는 구성군을 매우 아꼈기에 "없었던 일로 하자"며 덮고 덕중은 서인으로 강등당해 궁궐 밖으로 내쳐진다.

구성군은 조선시대 최연소 영의정(27세)에 오른 인물로 현대적으로 말하면 '엄친아'와 다름 없다. 남이 장군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세조에게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구성군 등 왕실 종친을 이용해 한명회 등 반정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그 때문에 많은 시기를 얻어 성종이 즉위한 후 탄핵당했다.

8. 조광조

SBS '여인천하'
SBS '여인천하'
위키백과
위키백과

'해동잡록'에는 조광조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다. "난새가 앉아 있는 듯, 봉황새가 버티어 선 듯, 옥처럼 윤택하며, 금처럼 정간하며, 아름다운 난초가 향기를 뿌리는 듯, 밝은 달이 빛을 내는 듯 하였다."

조광조는 외모보다 대쪽같은 지조와 빈틈없는 모습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일상 생활에서도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여 아침부터 해 저물 때까지와 땅거미가 질 때부터 삼경까지 오뚝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곤 했는데, 비록 밤이 짧은 한여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야사에 따르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것이 어찌 남자의 얼굴이란 말이냐"라고 한탄하기도 했다는데 확인되지는 않는다.

'동춘당집'에는 송준길이 "언젠가 조광조가 밤에 앉아 글을 읽고 있는데 이웃집 처녀가 그의 용모를 사모하여 담을 넘어 들어오자, 조광조가 예가 아니라고 꾸짖고는 종아리를 쳐서 보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야사에는 이 사례를 세종 때 문신이었던 정인지로 기록하고 있어 어떤 게 진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9. 유성룡

이하 KBS1 '징비록'
이하 KBS1 '징비록'

서애 유성룡에 대해서는 "태어나면서 밝고 순수하여 빛나는 구술이 막 물 속에서 나온 것만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야담에 따르면 워낙 미남이라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유성룡도 조광조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우복집'에서는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 엄숙하고 공손한 자세를 스스로 견지하면서 종일토록 엄연한 모습으로 있었으므로, 비록 집안사람이나 자제들이라고 하더라도 일찍이 비스듬히 기대거나 하는 등 해이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다만 조광조보다는 사람들에게 훨씬 호감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 화락한 모습으로 대해 마치 따사로운 봄기운이 사람을 감싸는 것과 같았다.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고, 나태하거나 오만한 기운을 몸에서 짓지 않았다"고 해 꽃미남이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호남형 얼굴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 애처가였다는 말이 있어 흥미롭다. "부인 곁에 있을 때만은 온갖 우스갯소리를 하고 재롱을 떨어 부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빈틈이 없어도 부인에게만은 약했던 것 같다.

10. 이항복

이항복은 키는 작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네 아이들과 씨름과 제기차기를 하고 다니는 등 매우 활발한 성격이었고 외모도 매우 준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에게는 '오성'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항복의 호는 '백사'다. '백사집'에 기록된 이항복 행장에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탁 트여서 큰 도량이 있었다. 신장(키)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외모가 걸출하고 풍채가 단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흠이 쓴 기록은 더 상세하다. 그는 백사 이항복에 대해 "풍채가 엄중하고 도량이 활달했으며, 널찍한 이마와 우뚝한 코에 뺨은 두툼하고 살결은 희었으며, 긴 수염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고, 행실은 외면적인 것을 꾸미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항복은 태어나서부터 비범한 모습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근심하여 점을 치게 하니 점쟁이가 '근심할 것 없다. 응당 더할 수 없이 귀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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