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똥 묻은 휴지 안 봐서 좋다“ 휴지통 없는 화장실 시행 후 요새 상황

2018-04-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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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1월, 공중 화장실 칸 내부에 있는 휴지통들을 없애는 '휴지통 없는 화장실'을 전면 시행했다.

"화장실에 휴지통 없어진 거요? 훨씬 깨끗하고 좋아요"

지난 23일 월요일, 퇴근 시간이 막 시작된 오후 6시 무렵 5호선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을 찾았다. 서대문역 인근에서 직장 생활 중이라는 박영은(31) 씨는 휴지통이 없어진 화장실이 반갑다고 했다.

그는 "딱히 불편한 건 없다. '휴지통 없는 화장실'이 계속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씨가 만족을 표하듯, 5호선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칸 9개 중 휴지가 떨어져 있거나 변기가 막혀있는 화장실 칸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난 23일 저녁 퇴근 무렵 찾은 5호선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 이하 위키트리
지난 23일 저녁 퇴근 무렵 찾은 5호선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 이하 위키트리
깨끗한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내부
깨끗한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내부

정부는 지난 1월 공중 화장실 칸 내부에 있는 휴지통들을 없애는 '휴지통 없는 화장실'을 전면 시행했다. 악취와 해충을 유발하는 휴지통을 없애 화장실 문화를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여자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어진 대신 칸마다 위생용품 수거함이 생겼다.

서울 지하철은 '휴지통 없는 화장실' 정책을 이보다 일찍 시행했다. 5~8호선은 지난 2014년 12월부터, 1~4호선은 지난 2017년 8월부터 시범운영을 거쳐 도입됐다.

여자 화장실 칸마다 설치된 위생용품수거함
여자 화장실 칸마다 설치된 위생용품수거함

시행 초반, 휴지통을 잃은 화장실이 더 더러워질 거라는 우려들이 쏟아졌다. 실제로 휴지통 대신 바닥에 쓰레기들이 돌아다니고, 변기 막힘도 더 자주 일어난다는 보도들도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 눈으로 확인한 지하철역 화장실들은 휴지통이 있었던 때보다 훨씬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화장실 이용객이 늘어나는 저녁 퇴근 시간대에 맞춰 지하철 화장실들을 돌아봤지만 더러운 곳은 없었다. '휴지통 없는 화장실' 문화가 어느 정도는 정착된 듯 보였다.

서대문역 화장실에서 만난 직장인 지현지(24) 씨는 "휴지통이 없어진 후 냄새나는 게 확실히 줄어든 것 같다"며 "보기에도 좋고 편리하다"고 말했다.

소수이긴 했지만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학생 김현주(23) 씨는 "쓰레기를 버릴 곳이 줄어든 느낌이라 좀 불편하다"며 "쓰레기를 화장실 칸 안에 그냥 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휴지통 없는 화장실 시행 이후 지하철 화장실에는 세면대 옆에 큰 휴지통이 비치됐다. 대신 다수가 이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넉넉한 사이즈가 놓였다.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세면대 옆에 비치된 휴지통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세면대 옆에 비치된 휴지통

이용객이 많은 시간임에도 서대문역 여자 화장실 휴지통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다. 서대문역 청소 담당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화장실 상태를 살폈다.

청소 담당자는 "매시간마다 청소를 한다. 휴지통이 없으니 일일이 비울 필요도 없고, 쓰레기가 덜 떨어져 있어서 관리하기는 편하다"고 말했다.

서대문역 역무원은 "휴지통 없는 화장실을 시행한 건 꽤 됐다"며 "전에는 휴지통이 넘쳐서 더러워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미관적으로 좋아졌다. 청소하시는 분들 업무도 줄었다"고 말했다.

서울지하철 5~8호선은 지난 2014년 12월(남자화장실), 2015년 4월(여자화장실)부터 '휴지통 없는 화장실'을 단계적으로 운영해왔다. 시행 첫해였던 2015년에는 서울 지하철 화장실 막힘 건수가 4889건이었지만, 이듬해 3521건을 기록하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여자 화장실의 경우, 휴지통이 있었던 2014년보다 100여 건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지난해 8, 9월부터 시행된 1~4호선은 어떨까. 지난 24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지하철 2호선 시청역과 홍대입구역을 찾았다. 유동인구가 상당히 많은 곳이다.

2호선 시청역 화장실 앞에 붙은 '휴지통 없는 화장실' 안내 문구
2호선 시청역 화장실 앞에 붙은 '휴지통 없는 화장실' 안내 문구

2호선 시청역 화장실 8칸 중 휴지가 떨어져 있거나 막혀있는 곳은 없었다. 1개 칸에만 휴지걸이 위에 전단지가 얹혀있었다.

시청역 여자 화장실 칸 휴지걸이 위에 얹힌 전단지
시청역 여자 화장실 칸 휴지걸이 위에 얹힌 전단지

서울 시내 지하철역 중 변기 막힘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홍대입구역은 20여 개 칸 중 2곳이 막혀있었다. 바닥에서 휴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2호선 홍대입구역 여자 화장실에는 변기 2개가 막혀있었다.
2호선 홍대입구역 여자 화장실에는 변기 2개가 막혀있었다.

홍대입구역으로 통학을 한다는 김레지나(24) 씨는 "지금 시간에 2칸이 막혀있는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라며 "예전이랑 비교하자면 확실히 깨끗해진 것 같다. 오물 묻은 휴지가 펼쳐져 있으면 속이 다 메스꺼웠는데 그런 걸 안 봐도 되니 좋다"고 말했다.

2호선 화장실 청소 담당자는 변기 막힘이 더 심해지진 않았냐는 질문에 "변기가 막히는 건 휴지통이랑은 상관없다. 사람이 많은 금요일이나 주말에 더 자주 막힌다"고 설명했다. "남 똥 닦은 휴지를 안 보는 것만 해도 승진한 기분이다"라고도 덧붙였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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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생활공간정책과 관계자는 "적절한 양의 휴지만 넣으면 변기가 막히지 않는다. 너무 많은 양을 한 번에 사용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휴지로 인한 변기 막힘 등은 비교적 간편하게 처리가 가능하다. 이물질이 들어가는 경우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며 "양말, 속옷 등 물에 녹지 않는 것이 변기에 들어가면 이후 처리는 고스란히 관리자 부담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실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의 경우 모두 수용성으로 만들어져 쉽게 물에 풀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사용한 휴지를 변기에 버리도록 하고 있다. 휴지를 변기통이 아닌 휴지통에 넣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부 남미국가뿐이다.

관계자는 "시행 초기라 변기에 이물질을 넣는 등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시민의식이 뒷받침된다면 쾌적한 화장실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 표혜령 대표는 "변기 옆 휴지통 문화는 문제가 많았다. 시각적으로 불쾌하고, 냄새도 나고, 심지어 파리 같은 벌레들이 꼬이기도 했다. 세균 번식이나 감염 우려도 있다. 시민들의 위생과 건강을 위해 화장실 휴지통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표 대표는 또 "'휴지통 없는 화장실' 시행 이후 현장을 다녀보면 조금씩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근 100년간 이어온 습관을 한 번에 바꾸긴 어렵겠지만, 향후 3~4년 정도면 국내 화장실 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