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공원파 vs 시청지하파” 둘로 나눠진 '서울 어르신' 핫플레이스 상황

2018-07-0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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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청과 종묘공원에서 만난 어르신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최근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시민청'이 서울 어르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 이하 손기영 기자
최근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시민청'이 서울 어르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 이하 손기영 기자

어르신 두 명이 실룩실룩 디스코를 추고, 덩실덩실 탈춤을 췄다.

초청 가수가 부른 노래는 고 김광석 씨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픈 노래였지만, 흥겹게 춤을 추는 어르신들을 보고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시민청' 공연무대 앞 풍경은 KBS '전국노래자랑'을 방불케 했다. 무대에 오른 가수가 기쁜 노래를 부르든지, 슬픈 노래를 부르든지 몇몇 어르신들은 노랫가락에 맞춰 못 말리는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어르신들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여기는 희로애락(喜怒哀樂) 가운데 오직 '락'만 존재하는, 어르신들에게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시민청 무료 공연인 '활력 콘서트'를 관람하는 어르신들. 몇몇 어르신들은 무대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했다
시민청 무료 공연인 '활력 콘서트'를 관람하는 어르신들. 몇몇 어르신들은 무대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동안 서울에서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곳은 단연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이었다. 그러나 최근 어르신들 사이에서 "덥거나 춥지 않고 심심하지도 않은 곳"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시민청은 새로운 '어르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급기야 일명 '종묘공원파'와 '시청지하파'로 어르신 모이는 곳이 양분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시민청은 지난 2013년 1월 개관했다. 서울시가 시민들을 위한 공연·전시·교육 프로그램 등을 하기 위해 서울시청 청사 지하 1~2층에 만든 공간이다. 시민청은 어린이, 청소년, 성인 등 다양한 연령대가 방문하지만 요즘 유독 어르신들 사랑을 독차지해 "노인청"이라는 농담 섞인 말도 나오고 있다.

시민청이 어르신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지난 2016년 말부터 열린 '태극기 집회'였다. 이들이 시민청을 자주 방문하게 만든 계기는 무료 공연인 '활력 콘서트'였다. 활력 콘서트는 가수와 연주자들 재능 기부를 받아 시민청 공연무대에서 평일은 오후 12시, 주말은 오후 12시·1시·3시·4시에 각각 열린다.

시민청에서 만난 A씨는 "태극기 집회할 때마다 여기에 나 같은 노인들이 많았다"며 "집회에 나간 노인들이 눈치 봐가며 소리 지르다가, 추우니까 여기 와서 잠시 쉬고 그랬다"고 말했다.

김모(68) 씨는 "여기에 점심 때 콘서트 프로그램이 있다. 아코디언 연주도 하고, 통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고"라며 "공짜로 문화생활을 할 수 있어 여기에 자주 온다"고 했다.

시민청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
시민청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

시민청을 위탁 운영하는 서울문화재단 관계자는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어르신들이 당시 날씨가 춥고 화장실 문제 때문에 시민청을 들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다가 '활력 콘서트'라는 공연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면서 어르신들 사이에서 시민청 인지도가 높아졌다"며 "어르신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오카리나 연주, 7080 포크 밴드 공연도 한다. 요즘은 어르신들이 주로 공연 때문에 여기에 오신다"고 했다.

서울문화재단은 '활력 콘서트' 관객은 보통 60~70명 정도이고, 이 가운데 40~50%는 어르신들이라고 했다. 어르신들은 주로 오전 11시~오후 4시 사이 시민청을 찾고, 이 시간대 어르신 방문 인원은 약 300명 정도라고 했다.

한 어르신이 시민청 간이도서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다
한 어르신이 시민청 간이도서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다

시민청은 서울시청 소속 경비 요원이 상주하고 있다. 소란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주는 어르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간이도서대에서 책을 빌려 볼 수 있고 시끄럽지 않은 분위기도 이곳 어르신들이 꼽은 시민청 매력이다.

지난달 20일 일부 어르신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시민청 벤치에서 독서를 하거나, 이어폰을 꼽고 스마트폰으로 음악감상을 하기도 했다.

'학교 교장' 출신이라고 밝힌 최모(81) 씨는 "시민청에서는 조용히 책도 보고 학문을 닦을 수 있다. 여기는 학구파나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온다"며 "종묘공원은 그런 데가 아니다. 거기는 의미 없이 시간만 때우는 영감들이나 가는 곳"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공원. 지난 2016년 공원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 말끔하게 정돈됐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공원. 지난 2016년 공원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 말끔하게 정돈됐다

시민청이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라면, 종묘공원은 어르신들에게 '오리지널' 핫플레이스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과거 종묘공원에서는 일부 어르신들이 음주를 하거나 고성방가를 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공원 주변은 노점상들 때문에 무질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종로구청 측이 단속을 강화하고, 지난 2016년 12월 종묘공원 리모델링 공사도 끝나면서 공원 분위기는 예전과 달라졌다.

지난달 11일 찾아간 종묘공원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공원은 예전보다 녹지가 많아졌고 말끔하게 정돈됐다. 술을 마시고 소란을 부리는 어르신도 없었다.

공원에는 어르신 100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바둑과 장기 두는데 바빴다. '다다다탁 다다다탁' 여기저기서 바둑알, 장기알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노트북 자판을 치는 소리만큼 요란했다. 이곳 어르신들은 바둑·장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종묘공원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어르신들
종묘공원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어르신들

곽모(67) 씨는 "여기는 1000원 만 내면 바둑판, 바둑알을 하루 종일 빌려준다. 최고다. 올 만하다"며 "시민청은 그냥 공연이나 하고 그런다. 몇 번 가봤는데 지하라서 답답하다. 여기는 바둑을 두러 온다"고 말했다.

오모(75) 씨는 "여기는 바둑 때문에 온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 다른 영감들과 어울리기도 좋다. 탁 트인 곳이라서 좀 크게 얘기하거나 전화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며 "시민청은 좀 내성적이고 갑갑한 영감들이나 가는 곳 같다. 종묘공원은 활기차고 자유로운 곳"이라고 했다.

종묘공원 어르신들 대다수는 바둑과 장기 두는 재미로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종묘공원 어르신들 대다수는 바둑과 장기 두는 재미로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시민청과 종묘공원에서 만난 어르신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시민청은 조용히 혼자 공연을 보거나 책을 읽는 어르신, 종묘공원은 호탕하게 담소를 나누며 바둑·장기를 함께 두는 어르신들이 대다수였다. 양측 모두 자신이 즐겨찾는 핫플레이스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종묘공원파'와 '시청지하파' 어르신들의 파벌(?) 경쟁은 새로운 서울 어르신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home 손기영 기자 sk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