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고통 방치돼” 아동 성학대 파문에 고개숙인 교황

2018-08-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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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가 오랫동안 간과되고, 은폐됐으며, 교회는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데 실패했다"

(바티칸시티=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곳곳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성직자들에 의한 아동 성학대 추문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20일 발표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사제들에게 어린 시절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오랫동안 방치되고, 묵살됐다"고 인정하며, 이런 일의 재발과 은폐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하 연합뉴스
이하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신인을 '하느님의 백성들'로 한 이 편지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감독해야 할 책무를 지닌 성직자와 사제에 의해 저질러진 잔학한 행위를 교회가 슬픔과 부끄러움을 갖고 인정하고, 비판하는 게 극히 중요하다"며 "우리 자신의 죄악과 타인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청에 따르면 가톨릭 역사상 교황이 12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전체에게 성직자가 아동을 상대로 저지른 성학대를 사과하는 서한을 쓴 것은 사상 처음이다. 전임 교황들을 포함해 지금까지 교황이 아동 성학대와 관련해 발송한 서한은 개별 국가나 주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황의 이번 서한은 최근 미국, 칠레, 호주 등에서 사제에 의한 아동 성학대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며 가톨릭 교회가 다시 위기에 빠진 가운데 나온 것이다.

지난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사법 당국은 주내 6개 가톨릭 교구 성직자들의 아동 성학대를 2년간 조사한 끝에 300명이 넘는 성직자가 1천 명이 넘는 아동에 가해를 한 사실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 가톨릭 교회를 당혹케 했다.

1940년대부터 70년에 걸쳐 수십 만 페이지의 내부 자료를 검토한 이 보고서에는 사춘기 이전의 소년인 피해자들이 성추행과 성폭행까지 당한 사실과, 가톨릭 교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포함됐다.

이 보고서로 여론이 들끓었지만, 교황청은 이틀이 지난 뒤인 지난 16일에야 그렉 버크 대변인 명의로 논평을 내놓아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에 처했다.

버크 대변인은 당시 "교황청은 아동 성학대를 단호하게 비난한다"며 이번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피해자들은 교황이 자신들의 편이라는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교황은 이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펜실베이니아 사법 당국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교황은 "미국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은 과거에 생긴 일들"이라면서도 "학대가 오랫동안 간과되고, 은폐됐으며, 교회는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시인했다.

교황은 그러면서 "교회는 속죄의 마음으로 과거의 죄와 실수를 인정하고 거듭나야 한다"며 "교회 공동체 내부의 학대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모든 신자가 힘을 보태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가톨릭 세계가정대회 참석차 이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오는 25∼26일 아일랜드 방문 기간에도 과거 성직자가 저지른 아동 성학대 문제는 가톨릭의 여성 차별 관행, 시대착오적인 낙태·동성애 반대 등의 입장과 더불어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00년대 초부터 아동을 상대로 한 과거 성직자들의 성폭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몸살을 앓아온 아일랜드는 교황청이 이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고 반발하며 2011년 교황청 주재 아일랜드 대사관을 전격 폐쇄한 바 있다. 이후 2014년에 규모를 훨씬 축소한 대사관을 재설치하는 등 최근 몇 년간 교황청과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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