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소라가 중학생 때 쓴 놀라운 수준의 '무협소설' (실제 소설 첨부)

2019-10-1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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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인터넷에 연재한 ‘비연신검’
“일 조회수 1000건 넘길 정도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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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a Kang(@reveramess_)님의 공유 게시물님,

배우 강소라의 독특한 과거가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강소라는 중학교 시절 무협소설 작가로 활동한 적이 있다.

강소라는 2011년 SBS ‘강심장’에서 “초등학교 때 동네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무협지를 접해 중학교 때 빠지게 됐다”면서 중학생 때 인터넷에 무협소설 ‘비연신검(悲然神劍)’을 연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강소라는 “무협지 마니아들에게 이건 중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강소라는 자신가 쓴 소설의 하루 조회수가 1000건을 넘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비연신검’은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다가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벚꽃이 흩날리는 어느 날 산 위에서 제자의 손에 스승이 싸늘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제자는 그제야 스승의 뜻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면 강소라가 쓴 작품의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비연신검’ 제1장 ‘어린 스승’을 소개한다. 중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비연신검(悲聯神劍) 1

題一將

어린 스승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란 길은 모두 꽁꽁 얼고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뎠다간 미끄러져서 다리 한 짝이 부러질 위험에 모두 바깥 출입을 삼가 하게 되는 송(宋)의 추운 겨울,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집들 중 유난히 정원과 나무가 많은 집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보!!아니 지금 이 언동설한에 애를 얼어 죽이려고 작정 하셨어요? 이걸 어떻게 진이에게 입혀요!! 좀 더 두꺼운 옷 없어요?"

"하하하.."

"그렇게 웃고 있기만 하면 옷이라도 뚝 떨어 진답니까!! 아명아, 아무래도 안되겠다. 진이 옷에다가 얼마 전 뽑아 온 오리 털을 팍팍 넣어 꿰매렴. 시간이 없단다."

"예!"

이 집안이 남들 다 따뜻한 방바닥에서 군밤이나 먹고 있을 때 넓디 넓은 마당에 나와 이리 난리를 피우는 이유는 바로 이 집 주인 부부의 애지중지하는 막내 아들 아진(亞進)때문이었다.

그 아진의 위로는 누나가 두 명이 있었는데, 그 둘 모두 얼마 후면 시집을 가게 되는 지라 아무래도 부모에게 남은 것은 35살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금지옥엽(金枝玉葉)(?) 기른 아들 하나 뿐이었다.

허나 그 기대도 잠시, 4살 때 천자문(千子文)을 띄고 6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했으며 10살이 되어서는 공자(孔子)와 맹자를 논하였고 12살이 되던 해에는 논어(論語)를 띄었음을 생각하니 아들이 이름난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걱정은 늘어만 갔다.

그 이유는 바로 아진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송에 있는 이름난 관리들이 모두 은근히 아진을 탐하였으나 신분이 평민인지라 함부로 자신의 밑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호시탐탐(虎視眈眈) 눈치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 때 이 잘난 아진을 악양(岳陽)에 있는 한중보(翰重寶) 왕야가 탐을 내니 그 외의 관리들은 진작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통탄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아진을 왕야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 후, 아진의 집에 왕야의 서찰이 도착했을 때, 그의 부모는 물론이고 누이들까지 눈을 부릅뜨고 반대를 했으나 1년간의 간곡한 아진의 부탁 끝에 눈물을 머금고 허락하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황으로 그렇게 강하다고 소문난 남궁모린이 우는 모습을 똑똑히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진아.. 애미는.. 애미는 아진이 없으면 어찌 사누.. 우리 아진이.."

".. 어머니..."

아진의 옷을 놓고 싸울 때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집안이 아진을 왕야에게 모시려는 마차가 도착하자 온 집안은 한순간 정적 속에 묻혔다.

마차를 바라보며 가족들 모두의 눈이 멍해지자 역시 믿음직한 아버지인 아현이 고개를 젓고 아내와 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모린이 바라보는 간절한 눈빛에 조용한 끄덕임으로 응답해 주었다.

그것은 곧 긍정, 그러니까 아진이의 앞길을 더 이상은 막지 말라는 일종의 충고와도 같았다.

아진의 누이 아명, 아화는 몇 년 뒤에 볼 지 모르는 동생의 어깨를 손으로 포근하게 감쌌고, 그의 아버지인 아현은 아무 말도 없이 담담하게 짐을 챙겼다.

그 와중에도 남궁모린은 벌써 한시진이 넘도록 아진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이제 막 열 세살이 된 아진은 그녀의 새처럼 작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흑단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진이는 꼭 돌아올 거에요. 꼭 멋있는 아들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그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세요. 누나, 내가 없더라도 어머니를 부탁해. 그리고 아버지."

"그 뒷 말은 이미 알고 있단다."

아현은 장난스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문 밖 마차에서 아진을 급히 부르는 마부의 소리가 들리자 남궁모린은 결국 그녀의 아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난 아진은 최대의 예를 표하는 큰 절을 한 번 한 후 큰 목소리로 코 앞에 다가온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 모두 잘 있어!!!!!"

"아진아!!-."

그 말을 마친 뒤 아진이 대문 밖으로 나서자 남궁모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의 손바닥 만한 손수건이 다 적셔지도록 울었고 점점 작아지는 마차와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아들이 떠나간 그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런 광경을 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떠했으련만 그는 한 가정의 가장답게 아내를 살며시 위로해 주었다.

"여보.."

"예.."

"우리 아진이는 분명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몸도 약한데다가.. 어리고.. "

"누구 자식인데요. 믿고 기다리십시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 수 밖에는 없겠죠."

"음. 아! 요 근처 산사에 불공을 드리는 게 어떻겠소?"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왼손바닥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친 후에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아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모린은 주머니에서 그 동안 모아둔 쌈짓돈을 꺼내어 낡은 봉투에 넣고 불안감과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사찰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연신검(悲聯神劍) 2, 3

-다그닥, 다그닥-

한편 마차에 올라탄 아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지 애써 작아지는 집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마부는 슬쩍 말을 건냈다.

"어머니께서 많이 슬퍼하시던 것 같으셨는데 괜찮으신지유?"

말투로 보아하니 촌에서도 아주 촌에서 온 마부 같았다.

아마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은 것으로 짐작하건데 이 곳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진의 얄쌍한 모습과는 달리 다소 뚱뚱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감을 주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인상이었다.

아진도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편하게 대답해주었다.

"염려에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러셔유?.. 심기가 불편해 보이셔서유.."

아무래도 마부의 눈에는 아진이 전혀 편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나 보다.

".... 어제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눈물이 나오는군요.."

결국은 솔직하게 털어놓는 아진이었다.

"다~ 그런 것이지유. 저도 마부가 되려 길을 떠났을 적 어머니께서 울던 모습이 지금 눈에도 선하지유.

헌데 소왕야(小王冶)의 스승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지유?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봐도 될런지유?"

사실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새파란 어린애가 마차에 들어와 마패를 내밀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사전에 매우 어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넉넉히 잡아도 스물은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례될 것도 없지요. 금년 13살입니다."

"허헛!! 13살이라구유? 정말이어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저, 정말 대단하셔유~. 제가 말로만 듣던 소공자(小孔子)를 여기서 뵙게 되네유."

소공자. 관리들이 눈독을 들이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널리 퍼져 버린 예명이었다.

"예? 소공자라니요."

"작은 공자님이라는 뜻이어유. 이 지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모르셨어유?"

"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과분할 따름입니다. 어찌 제가 그 높으신 공자님을.."

손 사례를 치며 아진이 말하자 마부 역시 고개를 흔들며 자신있게 말했다.

"아니어유, 아니어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셔유. 그래서 저 같은 천민에게도 존댓말을 써 주시지유."

"존댓말이 불편하십니까?"

"뭐,그런 것은 아니다만 항시 반말에 익숙해 있었던 터라 어색하지만 듣기는 좋습니다유."

뒷머리를 슬쩍 긁으며 웃는 모습은 정말 의심의 여지도 없는 순박한 농부의 모습이었다.

"하하..그럼 되었습니다. 아,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악양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음... 넉넉히 잡아 삼 사일 걸릴 거여유. 악양까지 가는 길에는 넘을 산도 없어 평탄하고, 중간에 있는 흥랑채(興浪寀)에게 돈을 조금 지불하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습지요."

"산적 말입니까?"

"예. 나라에서 때려 잡는다 어쩐다 해도 거의 포기하고 있다는 건 기정 사실이지유. 그나마 요즘은 옛날에 비해 나아져서 걷는 액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고 하지유."

"그렇군요.."

그 말을 마친 아진을 마차의 벽에 기대 앉아 아화가 고이 싸준 보따리에서 시인 구양수가 쓴 시집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빨간 손수건으로 싼 차를 꺼내 마셨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마부는 이내 심심해졌는지 대화를 시작하려고 자신의 이름을 조붕(朝鵬)이라 소개했고, 그냥 편하게 불러 달라고 얘기했다.

이런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진도 개의치 않고 그를 편하게 불렀고 단 몇 다경 만에 그들은 벌써부터 내내 담소를 나누는 친우(親遇)가 되어있었다.

그 뒤로 가는 길은 변함 없이 평탄했고 마차의 흔들림이 심하긴 했지만 그다지 불쾌할 정도는 아니어서 조붕과 아진은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근처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삼풍여관(渗風餘館)-

날려 쓴 대로 날려 쓴 티가 눈 앞에 바로 드러났지만 안은 의외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시설도 좋았다.

그 날은 유난히도 손님이 많아 아진 일행 말고도 이미 1층 식당에서는 여행객들로 보이는 많은 이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모두들 이 여관의 자랑인 어화향(漁花香)을 한 접씩 베어물고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밤이 깊은 데도 불구하고 여관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거의 꽉 차 있었던 식당에서 네 명의 손님이 빠져 나간 식탁으로 주인은 조붕과 아령을 안내했고, 조붕은 돈이 꽤나 넉넉했던지 어화향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저기, 너무 많이 주문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해해, 아니어유. 왕야님께서 아사(亞師)님을 극진히 모시라고 하셨구만유."

아사란 말은 스승이란 뜻에 아진의 성인 '아'자를 붙인 것인데 왕야의 스승은 따로 성 뒤에 대(大)자를 붙여 그 신분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 후로 음식이 나올 동안 조붕이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아진은 그의 어린 시절과 마부로 들어오게 된 대까지의 사연이 아무 말 없이 들어주었다.

중간에 듣다가 재미있는 사연이 있으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는 그에 맞추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총명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마음속은 동심이었다.

이런 아진이 더욱 더 마음에 들었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조붕은 접시 한 가득에 어화향을 담아 주며 모자르면 얼마든지 더 시켜도 된다고 밝은 웃음을 지었고 아진 또한 기분이 좋았는지 그 날 저녁은 배불리 먹게 되었다.

조붕은 나름대로 두둑히 채워진 배에 포만감을 느끼며 어디서 났는지 잘 다듬은 나무 이쑤시개로 이빨을 관리했고,

이쑤시개 하나를 아진에게 건네 주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동안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둘은 아무 말 없이 여관 방으로 올라갔고, 고요한 달빛 속에서 잠이 들었다.

-짹짹-

송의 겨울 아침은 날씨는 춥다 해도 따스한 햇살이 내비친다.

쌀쌀한 기온에 햇살의 따스함이 가려진다 해도 눈길을 걷다가 어느 한 지점에 서면 따뜻한 기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관에 있는 주인들은 그런 곳을 점찍어 두어 야트막한 정자를 만들고 이름이 꽤나 알려졌거나 내노라 하는 고급 여관인 경우에는 정자 주위에 이것저것 예쁜 식물들이란 모두 골라서 심기도 한다.

허나 지금 아진과 조붕이 일찍 일어나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정자는 사방이 눈이요, 들어오는 것은 바람이었다.

"저, 아사님. 이만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유. 이러다 감기 걸리시면 전 죽습니다요."

그는 통 사정을 했다.

아진의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왕야의 거처에서 누누히 최선을 다해 모시라는 충고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주의할 점은 선배 마부가 몰래 말해 준 것인데 모셔 올 스승의 몸이 꽤나 약하단다.

만약 이 상태로 그 귀하디 귀한 소왕야의 스승님이 감기에라도 걸린다면 자신은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 뿐더러 자칫하면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발 들어가 주시어유. 제가 이렇게 부탁해유."

조붕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방법 밖에는 둘이 동시에 살(?) 길이 없었던 것이다.

뭐, 당사자인 아진은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갈 길이 머니 아침은 마차에서 먹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예. 괜찮고 말구유. 어서 가시어유."

은은히 들려 오는 그 고운 목소리는 조붕에게 있어 더 이상 생(生)을 마감하지 않아도 된다는 하늘의 계시이자 자신의 인생을 불쌍히 여긴 부처님이 내려 주신 따뜻한 배려였다.

그는 아진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눈썹이 휘날리도록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조금 큰 만두 5개를 허겁지겁 싸가지고는 어제 다소 무리하게 달렸던 마차의 바퀴를 갈아주었다.

"아사님!! 준비 다 되었어유. 빨리 오셔유."

다행이도 아직까지 아진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한 조붕은 아진을 태우고는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힘들지 않으십니까? 어제 하루종일 말을 타셨다면 지치실 법도 하건만.."

"아니어유. 괜찮아유. 밥 먹고 하는 일이 이거였지유. 제가 소싯적부터 유일하게 교육 받았던 것이 이거 였어유.

원래 시골에 있던 이름난 집안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그 집안 가장이 왕의 모함으로 죽어 결국 한 왕야님에게로 오게 되었지유.

여기 와서는 놀림을 받았는데 그걸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죽어라고 말을 탔지유. 거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레에 돌을 얻어 놓고 말이지유."

"대단하군요!!"

"해해, 대단할 것도 없어유. 무식하게 힘만 쓰는 저보다는 소공자라 불리시는 아사님이 훨씬 더 훌륭하시지유. 암, 그렇고 말구유."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송은 무(武)보다는 문(文)을 중시하는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의 문에 입각한 관리들은 장군이나 병사들을 깔보고 멸시했고,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에 성취를 이루려 하겠는가.

후에 문에 치중하여 여러 문화를 싹틔웠지만 결국에는 그 이유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

아무튼 천하에서 가장 마차를 잘 모는 마부와 천하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아진은 그 다음 날 마지막 관문인 흥랑채에 도착하게 되었다.

흥랑채.

워낙에 산(山)자를 들어가는 자들을 발에 끼인 때만큼 보다도 쉽게 생각하는 무림인들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겐 그들 모두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여 어느 산을 넘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갈 때는 비상시에 산적들에게 줄 돈을 챙겨 가지고 다녀야 한다.

가급적이면 표사들이 가는 표행에 따라 나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표사들은 혹여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까 봐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부탁하지 않는 이상은 결단코 거부한다.

그건 이 쪽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아진과 조붕이 처한 위기와 마찬가지였으므로, 지금부터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크하하하하!!! 암, 그래야지. 이미 통행세는 알고 왔겠지?"

"무, 물론이어유. 여기 있.. 응?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아진님, 혹시 주머니에 자그마한 주머니 없으셔유?"

돈주머니가 사라졌다니! 그럼 앞으로 이들의 운명은 어찌 될 지는 결코 상상하기 싫은 내용이었다.

비록 흥랑채가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寀)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꽤나 실력 있다고 소문난 산적들이었다.

비연신검(悲聯神劍) 4

이것은 스스로 지옥으로 뛰어드는 길이자 매를 맞고 싶은 사람들이 수작을 거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조붕이 속 주머니를 향해 손이 가는 부분에서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착한(?) 산적들이 그의 한 마디에 그만 경직되고 말았다.

"에잇! 없는 척 하지 말고 어서 내 놓아라!! 꼭 있는 놈들이.. 쯧쯧. 원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 않았느냐!! 연극 하지 말고 어서 내 놓아라!!"

아진 일행에게 다가 온 산적 중 얼굴에 털이 덥수룩하고 집채만한 도끼를 쥔 힘 좀 쓰게 생긴 산적이 아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기, 진짜여유!! 죄송하지만 참말로 돈을 잃어버렸어유!!"

조붕은 정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비 맞은 강아지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덩치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산적들은 잠시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이 산채에서 요런 사람 조런 사람 만나서 돈을 빼앗기도 10년.

10년의 경력이라 함은 결코 만만히 볼 게 못되었다.

이런 어설픈 연기에(?) 속을 산적들이 아닌지라 아까 그 가운데 인물은 더욱 더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놈들이 끝까지 거짓말을!!"

"아니어유, 정말 아니어유. 제 옷이라도 벗겨 드릴 테니 지금 아사님을 꼭 모시고 가야 해유!!"

"아사? 방금 아사라 했느냐? 크,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구나.

저런 새파란 꼬맹이를 보고 방금 아사라 했느냐?"

하긴 의심할 여지는 충분했다.

생김새는 아무리 봐도 14살을 넘게 쳐주기는 힘들었고, 변변치 않은 옷 차림새는 물론 말할 것도 없으니 누가 이런 코흘리개 소년을 보고 누군가의 스승이라 지칭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억지를 부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끝까지 우리를 놀리는구나!!!"

"그게 아니어유. 절대 아니어유!!"

조붕은 결백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하나만은 아진을 확고히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모시게 될 주군의 스승을 말이다.

조붕은 그 투철한 희생정신과 의리로 산적들과 맞서기로 결정했는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믿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유. 한 판 붙.."

"잠깐!!!!!"

간만에 실력 좀 써보려는 그의 말을 막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은 흥랑채의 부채주 장한일이었다.

"부채주님!!"

그런 장한일을 알아 본 산적들이 고개를 푹 숙이자, 그때서야 그는 멈춰 서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빗이 역력했고 그때서야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서찰 한 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서찰을 안 펴 보면 다시는 빛을 못 볼 줄 알아라."

라는 강력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힘줄이 불뚝 솟은 이마를 보니 필시 5초 내로 펼쳐 보라는 뜻이었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똑똑한 아진은 덥썩 서찰을 받아 들고 그 의미를 해석하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비는 꽃을 찾아가나 꽃은 나비를 알지 아니하고 내 자연의 이치가 이러하니 황제가 찾아온들, 임금이 찾아온들, 이 마음 가눌 길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하리오.."

내용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노라고 아진은 생각했다.

글씨 체가 부드러운 것을 보아하니 여인이 쓴 것이 확실하고 이 정도의 시는 왠만한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문에 관심이 있는 규수들이 많이 비유를 들어 쓰는 '꽃과 나비' 였다.

주로 연애편지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지금 내게 이걸 보여 주는 산적이 여기 있는 시를 규수에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받았다 해도 해석을 못해서 가져온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건 아진의 딱 들어 맞는 생각이었다.

그의 시를 듣자마자 부채주 장한일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화를 냈고, 여러 가지 말을 했어도 결국 의미하는 말은 한 마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였다.

딱히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 산적이라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에는 취미가 없었던 것이다.

아진은 자신과 조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별로 여러운 일도 아닌 연애 편지 해석을 시작했다.

"여기서 나오는 꽃과 나비를 보아하니 꽃은 이것을 보낸 여자분을 비유하는 것 같고, 나비는 여자분에 관련된 남자 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1연에서 보니 나비는 꽃을 찾아가나 꽃은 나비를 알지 아니하고.. 라는 뜻은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찾아오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2연에 내 자연의 이치가 이러하니..는 이 서찰을 쓴 여인의 심정을 이름이고, '내 자연' 역시 여인의 마음을 이릅니다.

3연에 황제가 찾아온들, 임금이 찾아온들은 아무리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들이 찾아와도 라는 뜻이며,

끝으로 4연, 이 마음 가눌 길이 없으니 어찌하리오.. 는 아무래도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진이 한 마디도 쉬지 않고 구구절절을 해석 할 때 탄성이 나올 법도 하건만 산적의 반응은 조용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약 1각 정도를 기다리다 못한 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 물음에 답한 산적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의 발언은 차례차례 설명을 해 가며 뜻풀이를 해 줘도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으며 흥랑채를 모든 산적 채들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빛나는 바보들의 집단으로 등극을 올려 주는 일종의 승격 시험 합격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다.

"에.. 결론은 말이지요,"

비연신검(悲聯神劍) 5

-꿀꺽-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되어 침이 넘어가는 장한일.

그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을 지는 아진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 대답이 어느 정도의 중요한 가치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결론은..."

"그래, 결론은?"

장한일이 다시 기대에 부푼 눈빛으로 물었다.

허나 그 기대의 눈빛과는 다르게 아진의 대답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 차이셨습니다."

"뭐, 뭣? 차이다니!! 다시 한 번 해석해보아라!! 에잇, 역시 돌팔이가 분명하구나!!"

돌.팔.이.

결코 길지는 않지만 13년의 세월을 살아 온 아진에게 있어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이 있으랴.

감히 돌팔이라니.

지금껏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일컬어 돌팔이의 '돌'자도 얘기하지 않았으련만 지금 이 작자는 자신에게 당당하게 돌팔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말을 들었다는 것 만으로도 아진의 머릿속은 이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꼬여만 갔다.

그 심정을 알 길이 없는 장한일은 계속해서 아진의 어깨를 붙잡고 거짓말이라며 호통을 쳤고, 지금 이 상황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조붕이었다.

"그만 하세유!! 그만 하시라구유!!!"

간신히 조붕의 말을 듣고 어둠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아진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솟아오르려는 이마의 힘줄을 억누른 채로 떨리는 목소리를 동반하며 장한일에게 말했다.

앞에서 알았듯이 이 말 한마디가 두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어느 때보다도 신중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군요."

"무에라?"

"이 마음 가눌 길이 없다고 했으니 아직까지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

방금 아진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2명의 생명을 살렸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쯤에서 뇌세포 검사를 한 번 받아 봐야 할 것이다.

"방금 그 말이 사실이냐?"

"거짓은 아닙니다."

"음.... 정정당당(正正堂堂)한 우리 흥랑채가 무슨 사례를 해야 할 텐데..어이, 팔견(八犬)!! 은혜를 갚을 무슨 좋은 수라도 없나!"

장한일의 부름을 받은 팔견은 뭐 씹은 표정으로 곰곰히 머리를 굴렸다.

사실 산적에게 있어 은혜란 것은 평생 살아도 들어볼까 말까 한 그런 낯설은 단어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산적이 된 이유는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갚기 위해서임을 모르는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그들에게 있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고 은혜를 갚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얼마동안 머뭇머뭇 거리는 것을 보자 장한일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눈을 번뜩이며 아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예?"

본래 '제안'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의미였으나, 산적에게서 제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무조건적인 요구를 바라는 것이었다.

역시 그 말을 듣고 불안해진 아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붕이 아진의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팔을 쭉 뻗었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9명의 눈초리는 너무나도 매서웠다.

"아, 아사님.. 가시면 안되유!! 죽습니다유!!"

"흥, 우리가 비록 산적이라 하지만 지킬 건 지킨다. 못 믿겠으면 너도 따라 나서거라."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장한일이 조붕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하자 그는 팔견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아진의 뒤에 철썩 붙어 흥랑채의 요충지, 채주가 있는 흥랑굴로 들어섰다.

흥랑굴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로 15장 쯤 걷다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인데, 얼핏 봐서는 절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굴이라고 보기에도 뭣하고, 그저 구멍이라도 보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땅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흥랑땅굴이라도 불리기에는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았다.

모든 흥랑채의 산적들이 그냥 굴이라고 부르자고 목청껏 소리를 높였기에, 채주는 하는 수 없이 그 곳을 흥랑굴로 정했고 안은 커다란 장정 3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크기였다.

"채주님."

"음.. 한일이냐?"

"예. 저.. 그 시를 해석해 왔습니다."

"뭐!! 그 시를!! 그래, 무슨 뜻이냐. 그리고 해석해 준 자는 누구냐?"

"..."

장한일은 차마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시를 해석한 사람은 지금이라도 당장 보여 줄 수 있지만 시의 의미를 말하자니 자신의 앞날에 있어 어두운 구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입을 다물고 있어! 무슨 뜻이냐고 묻질 않아!!"

"사실.."

사실대로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돈과 명예가 중요하다 해도 사람에겐 목숨이 최고가 아니겠는가.

그의 선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 무슨 뜻이냐."

"아직까지는 남자가 없다고..."

결국 몇 가지 부분을 제외한 채로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갓 사십 세를 넘은 그에게 있어서는 최선,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냐!!"

"...그렇지요! 암요! 예, 그렇습죠!!"

한없이 비굴해지는 장한일이었다.

"험험, 그건 그렇고, 저 뒤에 있는 꼬맹이는 누구냐?"

"그.. 시를 해석해 준.."

"뭐라? 다시 한 번 말해보아라!!"

"그 시를 해석해 준 사람입니다.."

잠시동안 기대를 가졌던 채주 주원마의 아미가 다시금 찌푸려졌다.

거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거기서 그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 지금 네가 나를 놀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채주님!!"

"그럼 이 꼬마가 누구 길래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지?"

"이, 이 꼬마는!!"

어떻게 해서든 잘 꾸며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소공자입니다!!"

"소.공.자? 항간에 떠도는 그 소공자 말이냐?"

"예!!"

"그 소공자가 왜 여기에?"

"모르셨습니까요? 악양의 한중보 왕야가 소왕야의 스승으로 맡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1년 전에 말이다. 그 땐 분명 거부했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그 소공자가 다시 부모를 설득하여 이번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건 또 어떻게 믿지?"

"마, 마패를 보면 압니다!!"

"마패?"

"예!!"

이미 올 때까지 온 상황이었다.

여기서 '해해, 사실은 거짓입니다.'라고 말했다간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과 하직하는 안타깝고 불쌍한 일이 벌어질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비굴하게 죽기 보다는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밝히고 죽는 게 사나이다운 도리라고 생각한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채주의 칼이 목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마패를 꺼내라."

비연신검(悲聯神劍) 6

별로 믿기지는 않았지만 지금 주원마의 마음은 부디 앞에 있는 이 꼬마가 소공자이길 바랬다.

정말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도 코딱지만큼이라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의 심정과는 달리 타 들어 가는 심장을 움켜쥔 채로 목숨이 떨어질 때를 손꼽아 기다리는 장한일의 모습은 멀찍이서 보더라도 주원마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마패유?"

"그렇다. 귀족의 스승들에게만 준다는 그 패 말이다. 그 중에서도 정평이 난 한왕야의 왜 거.. 금색으로 주작이 수 놓아진.."

"아! 그거 말씀이셔유? 아사님, 어서 꺼내셔유."

"예."

얼떨결에 속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화려한 마패를 꺼내는 아진을 바라보는 주원마의 눈빛은 가히 경악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가 본 것은 가히 황제보다 까다롭게 스승을 본다는 한왕야가 주는 스승의 표식

주작경이 보란 듯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아진의 입지를 분명하게 해 주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어째서 그나마 무림인 축에 끼는 산적이 그리도 싫어하는 귀족의 일을 알고 있는가 하면 한왕야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적어도 스스로 송나라의 사람이라 칭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고, 주작경의 전통은 벌써 백년 정도를 내려오고 있으므로, 그리고 한왕야의 가문에서 일대에 남을 만한 최고의 현자가 나왔으므로 그 귀중한 물건을 받는 다는 것은 가문 대대로 자랑할 만한 사실이었으며 일대의 학자들은 주작경을 가진 소왕야의 스승을 가까이서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오래된 꿈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지금 이 보잘 것 없는 산적의 소굴에서 주원마는 길이길이 남을 역대 보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애초에 장한일을 믿지 안았지만 설마 사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는 믿어 주시겠습니까? 제 말은 사실입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진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하긴 빨리 가고 싶기도 했다. 단 일 초라도 소왕야를 만나 뵙고 왕야의 거처에 있는 모든 책들을 탐독해보고 싶은데 시간은 애석하게도 자꾸만 가고 있으니..

마음은 급한데 몸은 전혀 따라 주지 않으니 그 답답한 심정이야 이로 말 할 수 있으랴.

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증명이 되었으니 이만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통행세는 죄송하지만 지금은 안되겠군요. 제가 왕야의 집에 들어가면 바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통행세?"

"..예."

"내가 과연 그 말을 믿을 성 싶으냐? 그 말에 속은 것이 벌써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돈이 넘쳐 흘러 황하를 뒤덮고 남는다는 관리들이 그깟 돈이 얼마나 한다고 내지 않다니.

물론 통행세를 내지 않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며 굉장히 나쁜 일이지만 분명 약속을 했다 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진정한 군자는 함부로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헌데 그 군자의 기반이 되는 사소한 약속 조차도 지키지 못했다면...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럼 설마 거짓을 말하겠느냐?! 네가 아무리 그 잘나신 소공자라 해도 우린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다!!

네놈 같은 썩은 관리들이 우리를 위해 해 주는 게 무어냐!!"

그 동안 쌓아 놓았던 울분이 팍 터지는 뻥 뚫린 느낌이었다.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덩치가 산만한 주원마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 말을 했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으로 취급 받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분명히 눈물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절대 압력을 당하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은 스스로의 눈물이 말이다.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

"어찌하여 산적이 되신 겁니까."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남궁모린의 손수건을 주원마에게 건 낸 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산적? 크크.. 산적이라.. 그 놈들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 의문이군.

우린 절대로 아무나에게 통행세를 요구하지 않는다.

돈 좀 꽤나 있을 것 같은.. 적어도 마차 한 대씩은 몰고 오는 그런 놈들 말이다. 그 놈들에게 돈을 걷어서 도대체 뭘 하냐고?

사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도로 나누어 준다. 아무런 죄도 없는 우리같은 불쌍한 놈들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바보 같은 놈들에게 말이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뒤이어 무릎을 털썩 꿇고 굵디 굵은 손으로 뭉툭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손에서 붉은 액체가 나올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 싶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아진 역시 허망한 눈빛으로 앞이 깜깜한 동굴의 위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멍한 눈빛은 순식간에 다짐의 결의를 한 굵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다짐.

분명한 다짐이었다. 13살의 어린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앞으로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13살의 어린 아이의 가치관에서 앞으로의 송을 내다보고 송을 구한다는 꿈이 그려졌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의 일들이 13살의 아이에게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이.

-송의 추운 겨울. 아진의 첫 번째 다짐이었다.-

비연신검(悲聯神劍) 7

이로써 마패 사건은 일단락되어 장한일은 다행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고, 제안하고자 했던 것은 마음 속 깊숙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진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바래다 준다는 친절을 배 풀었고, 그때야 새삼스럽게 그 한 통의 편지가 주원마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었다.

그 후로도 왕야의 궁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도 평탄했다.

햇빛은 이 일을 축복하듯 어느 정도 양을 맞추어 적당히 아진 일행에게 쏘아 주었고,

행여 시비 거는 사람이라도 있을라 치면 주원마를 대신하여 호위를 맡게 된 장한일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비켜 주는 마음 착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여정이니 다행히 예상보다 더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 수고비는.."

아진이 두 엄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곤란한 듯 고개를 숙이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장한일은 남궁모린이 고이고이 만들어 준 꿀떡을 하나 냉큼 집어 삼키고는 다시 흥랑채로 돌아갔다.

대신 관리들의 일들을 꼭 왕야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해.. 덕분에 무사히 왔네유. 이제부터는 저는 저~쪽에 보이는 쪽문으로 가야해유."

"예? 쪽문이라니요. 같이 들어가세요."

"아니어유. 그리고 아마 이제부터는 아사님의 얼굴을 뵈려면 많이 힘들어 지겠어유."

쪽문과 후문(後問) 전문(前問) 대문(大問). 이 네 문들은 엄격한 서열의 현장을 내 비추고 있다.

우선 문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궁에서의 안전한 생활과 질서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흔히들 서열로 인해 각기 활동하는 곳이 다르고 받는 대우도 다르다.

그 중에서 팔에 단촐 하게 연꽃 하나가 그려진 황색이 옷을 입고 다니는 마굿간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마부, 시비, 시종 등은 제일 낮은 신분으로써 언제나 쪽문을 이용한다.

두 번째로 매화를 수놓은 하얀 백의를 입고 다니는 자들은 주로 식,의(食醫)에 관련된 말단들인데 흔히들 주방장 밑에서 요리하는 일반 요리사들이나 최고의원의 제자들이 이 쪽에 속한다.

세 번째로는 국화의 무늬를 수놓아진 청색의 옷을 입은 이 곳의 살림을 책임지는 관리들과 궁을 지키는 무사들이 전문을 지나다닌다.

흔히들 왕야의 거처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좋지 않은 병사라도 일반 서민들에게 본다면 꿈도 꾸지 못할 능력과 힘을 지녔으므로 아무리 문을 중시하는 송이라지만 이만한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끝으로 대문.

이 대문은 궁에 머무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왕야보다 더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그의 혈연들, 매우 친한 친구들. 또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승이었다.

아진은 아직 정식 스승은 아니었지만 이미 사전에 왕야의 전언이 있었기에 주작경을 내밀기만 하면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몇 다경 후에 있을 만남 후에 정식 스승이 되면 바로 적어도 궁 안에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 되는 것이다.

"신분제란 참으로 섭섭하군요.."

"해해.. 어여 들어 가셔유. 혹 밖에 나가는 일이 있게 되면 미리 연락을 드려 찾아뵐게유. 그래도 정 보고싶으시다면 월담이라도 해야지유."

".."

아진은 말이 없었다. 단 3일이지만 그 동안 친 형처럼 자신을 보살펴 준 조붕은 이젠 거의 만날 수 없다니. 가뜩이나 위에 누나들 밖에 없어 서운하던 차였는데, 듬직한 형이 생겨 얼마나 기뻐했던가.

게다가 조붕이 짓는 미소는 절대로 아부의 뜻이 포함되거나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산적들을 만났을 때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해주려 하지 않았던가.

"흑.. 흐흑.. 혀엉.."

끝내는 형이라도 불러보는 아진.

한 번쯤 꼬옥 불러보고 싶은 그런 단어였다.

"아, 아진아.. 이러면..."

가뜩이나 어머니와 헤어진지도 얼마 되지 않은 외로움 많은 13살의 작은 소년인데 그 외로움을 덜어 준 정이란 것이 얼마나 큰 값어치를 하는가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아진의 바램이 동했는지 조붕도 분위기에 이끌려 아진의 이름을 불렀고, 둘은 마치 친형제인양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크고 뭉툭한 손은 쓸쓸한 소년의 등을 어루만졌고, 별 힘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조붕의 마음을 따뜻하게 가라 앉혀 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둘은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듯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챙피하게 이게 뭔 꼴이람유. 지는 되는 대로 찾아뵙겠어유. 그때까지 훌륭한 스승이 되셔유."

"예.."

"대답이 그게 뭐여유!!! 더 크게 해야지유!!"

"예!!!!!!!!"

"해해,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네유. 어여 들어가셔유. 다음에 또 볼 일이 있겠지유."

이제 그만 가라는 듯이 조붕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진 역시 고개를 끄덕인 후 서서히 대문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허나 누가 이 별 거 아닌 것 같은 첫걸음이 후에 송을 바꿔 놓으리란 것을.

-쏴아아아아..-

대문을 지나자 하늘에서는 하늘하늘한 눈꽃 송이가 내려와 그를 환영했다.

"눈...."

순간 우수에 잠긴 눈으로 고개를 위로 젖히고 그 자리에 못 박은 듯이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아무 미련도 없는 듯 홱 돌아서서 시비의 안내를 받으며 서재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드륵-

"아.. 아사님께서 드셨습니다."

비연신검(悲聯神劍) 8

시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안절부절을 못하며 시선을 아래로 깐 채로 아진에게 말했다.

아마도 경험이 얼마 없는 것 같은 데 왜 그 중요한 서재에다 방치해 놨는지가 참으로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을 따질 상황이 되지 못했으므로 그는 결국 문턱을 넘어 휘장 사이로 가려진 왕야의 앞에서 두 손을 옷 자락 안으로 여미며 허리를 조금 숙여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흠!!"

왕야의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진을 보며 옆에 자리한 총관은 헛기침을 여러 번 했고

그래도 아진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끝내는 화를 내는 기색이 잔뜩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어허! 어느 안전인데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끝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진에게 갖다 대며 삿대질을 하자

그때가 되어서야 왕야 역시 총관과 비슷한 말투로 말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지금 내게 인사하는 자가 소공자가 맞는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보았나.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으려 했지만 어서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기 전엔 난 너를 정식 스승으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휘장 안에 가려져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험악한 그의 얼굴에서도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는데 단 몇 각 만에 인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

그래도 역시 묵묵부답(默默不答).

아진 역시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입을 떼지 않았다.

"이, 이런!!!!!"

-휘익-

이제는 아예 휘장까지 걷어 차 버리고 나오는 왕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염소수염을 기른 총관 박평태는 이마의 식은 땀만 닦은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 판단 처리를 담당하는 뇌에 무리가 가도록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이렇게 고집만 피우면 뭐가 되느냐? 어서 무릎을..."

그의 머리에서 짜 낼 수 있는 말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문에서 배운 것은 학문과 지식보다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일과 빠른 상황 판단이었으니 해결 방안이 나오기는 애초에 기대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쾅!!-

"됐다. 오냐, 해 볼 때 까지 해 보거라. 나는 이만 나가겠다. 박총관!!"

"예."

"지금부터 서재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침소로 옮기고 여기서 일하는 모든 시비, 시종들 역시 내 침소로 당분간 옮겨라.

물론 여기에 불을 지펴 놓았던 것도 끄고."

"예..."

"그리고!!!"

"?"

"3일 동안 문을 잠가 놓거라.

이 곳을 감시하기 위해 가장 힘이 센 병사 셋을 교대로 배치해놓고 만약 저 건방진 것이 행여라도 무릎을 꿇을 시엔 나를 부르고 중간에 허리를 필 때 역시 나를 불러라.

그러나, 계속 저 짓을 하고 있다면 3일 후에 나를 불러라. 이상이다. 자리를 옮기거라!"

화가 나도 이미 단단히 난 왕야였다.

비록 다혈질이고 성격이 급한 왕야지만 사람 볼 눈은 확실하다고 자부하는 바였다.

이번 아들의 스승을 뽑을 때도 과거를 관리하는 기관에서 아진의 상세 사항을 일일이 조사해보고,

출신이 아무리 비천하다고 해도 아들의 미래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라면 여느 귀족들처럼 일일이 따지고 드는 성격도 아니기에 일대에는 무림인들에 맘 먹게 호탕하다고 알려진 쾌남이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보통의 귀족들은 시비들이 옷에 물이나 먹을 것 등을 쏟았을 경우에는 심하게 매질을 하여 잘못하며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데,

오히려 왕야는 그런 시비를 감싸 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나 성격 좋은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거짓말을 하였을 경우.

둘째, 버릇이 없을 경우.

이 중에서도 아진은 물어볼 것도 없이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였는데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을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왕야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처사일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왕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고 하나의 등불만 쓸쓸히 빛을 비추고 있는 이 서재에서 아진은 달랑 얇은 면으로 된 옷 한 겹 만을 걸친 채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처음엔 열심히 감시하던 병사도 몇 시진이 되자 이내 지쳤는지 전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와 자리를 바꾸어 교대를 섰다.

그러나 깜깜한 밤이 되어도, 닭이 목청껏 소리 높여 아침을 알리는 새벽이 되어도 도대체가 요지부동(搖之不動).

혹시나 자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어 3번째 병사가 귀 기울여 코 고는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보이는 건 동그랗게 뜬 맑은 눈이고 들리는 건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매우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그 상황이 거의 이틀째에 다다르자 서재 앞을 지키고 있던 첫 번째 병사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만 해라 제발!!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우선은 니 목숨이 최고지.

그냥 조용히 무릎을 꿇었으면 나한테나 누구한테나 꾸벅꾸벅 인사를 받았을 텐데 괜히 빌어먹을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하는 짓이 이게 뭐냐? 이렇게 한다고 누가 너를 알아주기라도 한대냐?

쯥. 오히려 미움만 사기 쉽 상이다. 내가 조용히 총관님한테 말해볼 테니 그만 허리를 펴라.

응?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마지막에 그가 내뱉었던 말은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과 흡사했다.

자고로 무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잠과 먹을 것인데 요즘 식량난 때문에 먹는 것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잠도 부족하지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은 이미 산이 되어 하늘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지.

아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옆에서 병사의 크디 큰 잔소리를 들으며 또 하루가 지나가 이젠 3일째에 접어들었다.

비연신검(悲聯神劍) 9

3일 째 아침.

전문의 제 2관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가 하품을 쭉 하며 어슬렁어슬렁 서재로 향했다.

그는 팔에 큰 천을 하나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용도인지는 그 자신 만이 알고 있으리라.

"룰루루~~"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옆에 주름이 살짝 진 눈은 마치 하회탈의 그것 같았다.

-턱-

한참을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고 가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기지개를 힘껏 켰다.

하긴 그럴 만도 하려니..

달력에 붓으로 몇 겹이 동그라미를 친 그 지긋지긋한 서재 경비병 일의 끝을 알리는 날이 바로 오늘이니 그 기쁨이란 것은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를 만큼 클 것이다.

그리고 서재 앞에 당도했을 때, 방 안에 숨을 헐떡이며 창백해져 있을 13살의 소년을 보며 잠시 침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노고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당당하게 문을 열어 젖혔다.

"커, 컥!!"

허나 서재 안에는 돌같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진이 보였고, 비록 안색은 창백했지만 입가에는 작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등은 만져 보니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고 가뜩이나 하얀 얼굴은 3일 동안 식사를 굶은 덕분에 더욱 하얘져서 이젠 저게 사람의 몰골일까.. 하는 의심 마저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평생동안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꼈고, 멀리서 들려 오는 왕야의 발소리도 오늘은 왠지 반갑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는 주먹밥을 꺼내 저 불쌍한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데, 지금의 상황은 절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3일 동안 자존심과 의지를 꺾지 않았던 일은 누구에게라도 존경받을 만 하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였다.

애초부터 왕야의 노여움을 샀으니 스스로는 의지를 꺾지 않으려 해도 타에 의해 꺾여질 것이며 자칫 하다간 소왕야의 스승이 되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린 대신 뼈아픈 대가를 치르며 어딘가에 버려질지도 모른다.

"왕야 납시오!!"

결국에는 벌어져서는 안되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궁을 지킬 권리와 의무 밖에 지니지 않은 한낱 병사이거늘..

세상에 이름난 돌 머리 중에서도 가장 일등급으로 쳐주는 초특급 돌 머리가 바로 자신인 것을..

"아, 아니 이런!!!!!"

역시나 서재에 들어선 왕야의 살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을 법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그 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줄이야.

과연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처리 할 것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전날 총관을 시켜 궁에서 쫓아낼 준비를 하며 각처에서 이름난 선비들을 둘러보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흠흠!!"

그는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아진의 눈초리가 심히 부담스러웠던지 평소에 하지 않던 헛기침까지 하며 커다란 장정 두 명은 넉넉히 앉고도 남을 밤색의 참나무 의자에 앉아 큰 손으로 얼굴을 싸매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긴 해야 할 텐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다니.

혹시나 하여 기대를 갖고 총관에게 눈짓을 줘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쓸쓸한 뒷모습 뿐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끌어야 했기에 이젠 무섭기마저 한 아진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질문을 하나 하겠네. 왜 이때까지 버티고 있었는가?"

"......."

"어허!!"

"... 만약... 만약 3일 전 제가 아무리 부탁을 해 보아도 제 말을 듣지 않으셨을 겁

니다."

"...."

"또한 누군가를 통해 제가 할 말을 전했더라 해도 왕야께서는 분명히 화를 내셨을 겁니다."

"응? 그게 무슨 뜻인가. 화를 내다니.."

"아침에 있었던 일이 분하시어 누군가가 한 말을 잘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분

노하셨을 것입니다.

... 하여 저는 3일을 택하였습니다. 그만큼 제가 앞으로 할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중요하다...라... 좋네. 말해보게. 왜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았는가를.."

잠깐 동요를 일으킨 왕야는 흥미가 생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진도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았으며 큰 호흡을 한 번 한 뒤 또박또박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승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드리고자 함입니다.

왕야께서 1년 전에 서찰로 보내셨던 대로 스승은 책이 아닙니다. 그저 책에 적혀 있는 것만을 읽어 주는 인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에게 있어 스승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며 또한 어릴 적에는 인생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된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부모와 같은 존재이며 아시다시피 부모와 지네는 시간보다 스승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욱 많사옵니다.

그 긴긴 시간 동안 제자는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스승의.. 행동이지."

"바로 맞추셨습니다. 스승의 행동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것을 따라 합니다.

특히 그 제자가 어릴 수록 그것은 습관이 되어 커서도 몸에서 은근히 자연스럽게 행동 양식이 베어 나지요.

스승은 아비와도 같습니다.

제가 스승을 결심한 이후부터 전 자식을 하나 갖게 되는 것이고 그 자식에게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종의 막중한 임무를 띄고 있는 것이지요."

아진의 말을 곰곰히 새겨 듣던 왕야는 잠시 침울해 지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7살 난 아들.. 어느 이름난 장원들이 와서 가르치려 해도 쏙쏙 빠져나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말썽쟁이인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다.

"하하!!! 그럼 우리 하민이를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모든 스승이 와서도 포기했던 그 하민이를??"

"예. 할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자신하는가?"

"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13살 어린 소년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 보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당돌할 법 했지만 그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왕야는 그 솔직하고 진솔한 눈빛에서 아진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좋네, 좋아.. 하하.. 이리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허무했던가....사실 내가 자네를

여기 들여온 것도 하민이에게 단 한 글자라도 가르쳐 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어..

그 아이의 아픔을 감싸 주지 않았고 단지 내 욕심만이 아이의 마음을 메우고 있었을

뿐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자네에게 하민이를 맡겨 볼 것이야. 그리고 자네를 하민이의 정식 스승으로 임명하겠네.

또한 부탁 하나를 들어줄 수 있겠나?"

"예?"

아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지금껏 쌓였던

분노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내 인사를 받게나."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소매를 한 군데로 모으고 눈을 감았다.

왕야의 돌발스러운 행동에 총관을 비롯하여 장내의 모든 사람들 역시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으며 아진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아니, 내가 절을 하는 사람은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선 내 자식의 아버지일세."

왕야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깨달아 주었다.

아진도 그에 보답하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

-풀썩-

허나 마음과는 달리 3일간의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는 하민을 보자 왕야는 재빨리 손짓을 하여 의원을 찾았다.

"의원을, 의원을 불러 와!!!"

비연신검(悲聯神劍) 10

왕야의 우뢰와 같은 한 마디에 의원 외당 전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송에서 이름난 의원을 차리고 있는 의원들 모두가 칭송하고 있는 최고의원 환수(歡手) 진평조(進平調)가 현 왕야의 조카 뻘 정도 되는 화언(花言)공주의 심한 독감으로 인해 외진 중이기 때문에

그를 보조하는 환수일제(歡手一弟) 진평원(進平元)을 급히 서재로 들였다.

진평원은 기침을 하자 마자 옷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이래저래 약재로 침통을 들고 허겁지겁 일반 의원들과 함께 서재로 향했으며,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침을 풀고 진맥을 시작했다.

"음... 헛!! 허어... 거.. 흐음.."

한숨과 놀람을 계속해서 표현하는 그의 말을 따라 왕야의 얼굴은 굳어졌다가도 풀어졌고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 하자 진평원은 그를 슬쩍 돌아보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었다.

"다행이도 별 탈은 없어 보입니다.

며칠 간 푹 쉬다 보면 자연스레 나을 것이니 간단하게 영양을 보충해 주는 영양식에 들어갈 약재들을 식원(食院)에 맡겨 놓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해 두긴 상태가 의외로 위급합니다.

아사님을 간호할 의녀 몇을 놓고 가겠으니 밤에는 시종 하나를 시켜 땀을 닦으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만약 소홀히 할 시에는 가뜩이나 몸이 약하신 아사님에게 있어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진평조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한 번 아진의 왼쪽 손을 진맥해 보더니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데려 온 의녀 몇을 남긴 뒤 서재를 빠져나가 식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편 서재 안의 왕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병사가 가져온 큰 천에 아진을 태워 병사에게 미리 꾸며 놓은 주작궁으로 가게끔 명을 내렸고 업무 중일 때도 틈틈히 아진을 방문하여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아무리 스승이라지만 아들 뻘 정도 되는 나이였으므로 창백한 인상에 흐르는 땀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의녀들 역시 안타까운 왕야의 마음을 알았기에 더욱 더 열심히 간호했으며 식원의 총 주방장 팽호(彭浩)역시 최선을 다해 요리를 준비했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간호와 염려 때문이었을까.

아진의 회복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덕분에 황궁에 있는 진평조도 마음을 놓고 공주를 보살필 수 있었다.

또한 아진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이미 악양에는 그에 관한 소문이 쫘악 퍼져 있었는데 소공자에서 소군자(小君子)로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어느 따사로운 겨울날 약 일주일이 조금 넘어 반가운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으음.. "

가벼운 신음성을 낸 아진은 몸이 그나마 가뿐해 졌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머리맡을 침대에 대고 자고 있는 시종을 보며 곤히 잠을 자는 것을 깨우기 싫었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그 동안 상당히 많은 갈증이 있었던 터라 한 뼘 만한 주전자 한 통을 다 비우고도 모자람이 있어 밖에 연못으로 가 목을 축이고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몸단장을 했다.

다행이도 그가 입을 옷은 방 한 가운데에 정성껏 다림질 한 흔적이 남아 있는 관복이 있었고 새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자세히 훝어 보니 크기를 여러 차례 줄인 티가 이 곳 저 곳에서 났다.

"후훗, 감사합니다."

아진은 이 옷을 줄여 놓은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햇빛을 받아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옷을 입고는 머리를 단정하게 위로 올려 하나로 묶고 천으로 싸맨 뒤에 흰색 끈으로 고정시켰다.

전에는 머리가 미처 가려져서 보지 못했는데 평범하게 생긴 듯 하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매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잡아 두기엔 충분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동그랗게 뜬 귀여운 두 눈엔 범인(凡人)에게는 느껴 볼 수 없는 현기가 은은히 베어 나오고 있었으므로 어찌 보면 구름 위에 산다는 아기 동자와 비슷하기도 했다.

아무튼 앞의 특징들을 살펴 보았을 때 아진은 성격과 모든 것이 외모와 딱 들어 맞았으므로

척 보아도 '소군자' 라는 사실을 미련 없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외모란 것이 밝혀졌다.

-쭈욱-

"이얏!!"

두 팔을 깍지 껴서 하늘을 향해 쭉 편 그는 좌우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끝으로 거울을 한 번 들여다 본 뒤 안에 양털이 들어간 흰 목도리를 하고

두꺼운 속옷에 맞는 발 목을 넘는 겨울 용 신발을 신은 뒤 한 쪽 손에 두 개의 서책을 끼고 지금쯤 이마를 싸매며 열심히 고심하고 있을 왕야를 보러 다시금 서재로 갔다.

"아사님 드셨습니다."

아쉽게도 지난 번 약간 서툴렀던 시비는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 약관을 조금 넘은 듯한 시비가 그 곳에 있었으며 그녀의 말을 들은 왕야는 아진을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오오, 일어나셨습니까?"

"예.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왕야는 아진에게 그 일 이후로 존댓말을 쓰고 있었는데 다소 거북하긴 했지만 아진이 자처했던 일이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노력 하고 화재를 바꾸어 소왕야에 대해 간단한 질문 몇 개를 던졌다.

"저..."

"아아, 알고 있습니다. 하민이 말이지요? 지금 아마도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아 한창 잠을 자고 있을 겁니다.

그 아이에게 회초리를 휘두르셔도 좋고 어떻게 하셔도 좋으니 부디 부탁 드립니다."

"하하.. 굳이 그럴 필요는.."

"아닙니다!! 지금이야 그러시겠지만 며칠만 지내보시면 그럴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 오르실 겁니다.

지금까지의 스승들도 모두 그랬지요. 아무리 아사님의 인내심이 높다고는 하지만 그 놈 앞에서는 한 풀 꺾이실 겁니다."

"그 정도로.. 심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우선 한 번 만나 보시지요.

도대체가 누구를 닮아 성격이 저리도 삐뚤어 졌는지 원... 아무튼 힘내십시오. 무슨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총관을 시키시구요."

"아낌없는 지원 감사 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소왕전(小王殿)으로 가보겠습니다."

"꼭 회초리를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끝에 가벼운 농담을 한 왕야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어제 밤 마치지 못한 상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아진도 가는 길에 서고에 들려 천자문을 가지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소왕전 앞에 섰다.

"어머니.. 아버지.. 누나들..."

비연신검(悲聯神劍) 11

-꿈틀-

작은 미동.

아주 깊은 잠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는 의미이므로 아진은 큰 마음을 먹고 소왕야의 머리맡에 다가가 이마에 꿀밤을 몇 대 먹였다.

-꽁!!-

"아야!!!"

큰 마음을 먹고 한 효과가 의외로 컸는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소왕야는 짧은 신음성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금 자신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상대도 보지 않은 채 다짜고짜 볼을 후려 갈겼다.

-철썩 철썩 철썩-

"이, 이 건방진 것 같으니.. 어디 감히 하민님이 곤히 잠 자고 있는데 깨우느냐?!"

그는 씩씩거리며 말을 하는 와중에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한 일 분쯤이 지나자 그 때 서야 분이 풀렸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초인의 심정으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아진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흠. 일단 이것으로 됐어.

네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종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미리 말해두지만 앞으로 더욱 더 조심 하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

그리고는 새벽에 시비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녹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매우 귀찮은 듯이 한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앞에 있던 건방진 시종(?)은 자리를 뜨긴 커녕 오히려 비싼 참나무로 만들어 진 탁자를 방 안이 울리도록 내리쳤다.

-쾅!!-

"뭐,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 손 놓지 못해? 이게 건방지게 어..."

하민은 드디어 앞의 시종이 입고 있던 옷자락에 달려 있는 주작경을 보았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늦게 보았다는 것에 달리긴 했지만...

".... 설마.. 스, 스승? 당신이? 아니, 네가?"

"예. 애석하게도 이제 막 15살 먹은 제가 애석하게도 하민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마, 말도 안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고! 자, 잠깐.

너... 그 주작경 가짜 아니야? 아버지가 고르는 스승이 하나같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데 너를 고르겠어.

사실대로 말해 봐. 너 주작경을 가짜로 위조해서 궁을 빠져 나가려는 시종이지? 그렇지?

그렇다면 진작 말하지. 내가 되도록 잘 말씀 드려서 그렇게 해 줄런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아무튼 안됐어. 아마 나가기는커녕 평생 여기서 매나 맞으며 지내야 할 걸? 흐흐.. 아마 십중팔구는."

분명 아진의 귀가 잘못 되지 않았다면 방금 전 하민이 말한 문장들을 요약해 보자면 스승을 '놈'이라 칭하였고 자신을 '시종'이라 말했으며,

평생을 걸려 어느 누구도 속이지 못하게끔 주작경을 만든 희대의 장인 노심(努心)을 비웃는 말을 했다.

여기서 더 참을 인내심이 나온다면 아마 희대의 성인으로 추앙받을 것이며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신선이 되었으리라.

안타깝게도 아진은 희대의 성인이나 신선이 될 마음이 없었으므로 미간에 그려진 내 천(川)자와 서서히 튀어 오르기 시작하는 혈관들을 억누르며 떨리는 마음으로 되 받아 쳤다.

"죄.. 죄송하지만 저는 시종도 아니고 이 주작경도 가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스승이고 왕야 님이 주신 전권에 따라 나는 당신, 아니 소왕야님을 처분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와 함께 청사전(靑師殿)으로 가시지요."

청사전은 말 그대로 스승이 사는 곳인데, 제자와 스승의 끈끈한 정을 몸소 표현하듯 하민이 머무는 소왕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다소 적으나 그 사이에 있는 고서전(古書殿)이 하나의 통로가 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어있다.

고서전 역시 옛 책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이로 인해 아진의 학문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할 것이다.

어쨌든 아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귓구멍을 후비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주변을 지나던 시녀들은 꽤나 익숙해 졌다는 듯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왔던 스승의 경우에는 모두가 그 밀고 당기는 싸움을 말렸지만 2번 3번째로 스승이 바뀌면서 예전에 불타오르던 소왕야에 대한 관심과 충성심도 모두 없어진 지는 꽤 되었다.

"그럼 가시지 않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흥."

최소한 여기까지는 기대 했는데도 대답이 없는 소왕야를 보자 아진은 일어서서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러나 방을 나가는 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코웃음을 쳤고 문이 닫히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소(紹蘇)의 시중을 받으며 아침 식사를 했다.

"우물우물... 음.. 소소."

"예, 전하."

"솔직히 전에 온 그 놈이 진짜 스승인줄은 알았지?"

"예, 전하."

"좋아. 그렇다면 소소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아 참!! 이번은 좀 더 강도가 세게 말이야.. 어린 것이 아직 주제를 모르고 있잖아."

"예, 전하."

소소는 하민과 같은 날 거의 동시에 태어났으므로 나이가 같았고, 그것이 우연히 왕야의 귀에 들어 특별히 궁에서 또래의 친구가 없는 하민에게 말 벗이 되어 달라는 하명을 받았다.

다행히 왕야의 바램대로 그 둘은 죽이 척척 맞았으며 소소는 하민에게 있어 아버지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금껏 자신의 말을 그 누구보다도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나이가 같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생각도 같았다.

그런 소소였기에 스승을 몰아낼 계획도 머리를 맞대고 짰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으므로 소소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전하."

"응."

"어느 것부터 할까요?"

"흐음~~ 글쎄에.."

"아마도 말투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출신이 귀족이 분명 할텐데 그 방법을 쓸까요?"

"아~~ '그거'?"

"예."

"뭐, 좋아... 당장 오늘부터 실행하지!!"

비연신검(悲聯神劍) 12 -1화 마침-

-샤샤샥-

한 밤중에 청사전의 벽 쪽에 붙어 눈동자를 마구 굴려 대는 소녀가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소소.

행여 옷자락이라도 눈에 띄일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길고 너비가 넓은 끈으로 치맛자락을 동여 매고 아진이라는 소나무로 만든 작은 문패가 걸려 있는 큰 문을 열었다.

"휴우.."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는지 아진은 아직도 숨 소리를 고르게 내며 하얀 휘장이 쳐진 침대 안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소소는 다시 한 번 눈치를 살피며 꽤 큰 흰 주머니를 침대 옆에 내려다 놓고는 누가 볼세라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청사전을 빠져 나와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소왕전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소소!! 어떻게 됐어?"

"예, 전하.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침대 바로 옆에 살짝 놓아두고 왔습니다."

사실 소소도 아진이 진짜로 자는지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설사 깨어 있더라도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 했을 리는 더 이상 고민할 가치도 없으므로 괜한 걱정이라 생각하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소소의 대답을 들은 하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이내 잠의 나락에 빠져 들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내일이 어서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그 시각의 청사전.

청사전에서도 소왕전 못지 않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지금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던 아진은 자기는 커녕 실눈을 뜨고

소소가 놓고 간 하얀 주머니를 열어 안의 꾸물거리는 것들을 확인하고 재미있다는 듯 눈웃음을 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옆에 숨어 있던 그를 담당하는 시종을 불러 그 주머니를 밖에 버리고 오게끔 시킨 후 잠자리에 들었다.

-짹짹짹-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지저귀는 새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소왕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아침을.."

"아니, 오늘은 그보다 급한 일이 하나 있지. 가자."

"예."

하민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사전으로 향했고

그 곳에 당도했을 때 그 기대는 끝이 없도록 무너져 버렸다.

이유인즉슨 지금쯤이면 아진 휘하의 모든 시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약재들을 나르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와 반대로 너무나도 평안하게 아침상을 나르는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만약 아진이 어제 놓은 독이 있는 전갈에게 물려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인간이 아니라는 무림인이라는 건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렇게 잠깐 생각한 하민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지금쯤 식사를 하고 있을 아진에게로 달려가 문을 박차고 들어갈까 하다가 고개를 젖고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그것도 꼬박꼬박 존댓말과 무수히 풍겨 나오는 존경심을 담아서.

"저.. 스승님. 하민이옵니다."

"....."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민이 아무리 목청 터져라 아진과 그의 시종들을 불러보아도 달그락 거리는 음식들 소리만 날 뿐 도무지 사람의 목소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던 하민은 도리어 지쳤는지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을 하며 소왕전으로 향했고 그가 맥없이 떠나가자 식사를 하고 있던 아진에게 어제의 시종이 물었다.

"저.. 어찌하여 대답을 아니 하셨는지요?"

"훗. 대답 말입니까."

"예."

"뻔하지 않습니까. 물론 앞으로의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지요."

"욕심.. 이라니요?"

"내 듣기로는 소왕야가 굉장한 사고뭉치라 들었습니다. 소문이 맞습니까?"

"예. 아마 궁 안은 물론 악양에 사는 거의 모든 백성들도 귀가 따갑게 들었지요."

"그렇다면 소왕야가 왜 사고뭉치가 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 원인이요? 그, 그런 원인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하하, 물론이지요. 예, 있고 말고요."

"도대체 무슨 원인입니까?"

"음... 본시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 꼭 하나씩은 있는 그런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또래의 친구들이 많고 형제나 자매들이 많습니다.

물론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부모가 둘 다 있고 말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왕가나 황가의 아이들을 보면 그와는 상반된 조건을 보입니다."

"흠....... 어, 아!"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역시 부모나 형제들은 많지만 그들을 생각하는 인식이 다르지요.

아무리 착하고 영리하지 않은 귀족가문의 아이라 해도 본시 계승권의 싸움에 휘 말리게 됩니다.

그 중에서 물론 부모의 강요나 다른 사람의 무관심으로 반항아가 생길 수 있고 그들은 학문을 닦을 의욕이나 누군가에게 간섭을 받기 싫어하지요.

하지만 하민님은 이 경우와는 약간 다르지요."

"아!!"

"예. 전하께서는 서로 싸워야 할 형제도 없고 그렇다고 뭐 하나 부족한 것도 없었지요.

비록 어머니께서 운명하시긴 하셨지만 아버지는 그 만큼의 정성을 기울이셨고 궁 안에서는 그가 왕이라 해도 별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까?

허나, 문제는 거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왕야께서는 비록 하민님에게 돈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다 내어 주셨지만 단 하나.

따뜻한 관심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 후로 지방에서 올라 온 스승들도 소왕야님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분의 능력과 지위, 명예만을 보고 학문을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하민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 누군가의 관심? 마음?"

"......"

".. 빈 껍데기만 남은 사랑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외로.. 움..."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외로움을 치유해주고 싶습니다.

또한, 나중에 악양과 황제 폐하를 보좌하는 왕야가 되시면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안고 사는 백성들을 따뜻하게 감싸 외로움을 보듬어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아사님......"

"그것이... 제 가장 큰 바램이자 욕심입니다.

저는 그 바램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제가 생각한 제 방식대로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하.."

"예. 이 하만길. 성심성의껏 아사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훗... 감사합니다."

-1화 어린스승 마침-

home 채석원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