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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乙로페셔널'

    • • “죄송합니다.”
      


    이하 윤디자인연구소




    “죄송합니다.” 

     

    오후 2시경의 어느 대행사 사무실. 턱을 괸 채 전화를 받던 남자는 별안간 자세를 고쳐 잡고 말했습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희도 늘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만···, 네, 네, 그렇습니다, 네, 맞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희도 바로 그걸 의도했습니다만···, 네,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남자는 탁상달력을 물끄러미 쳐다봤습니다. 그러고는 0.3밀리 샤프펜슬로 오늘 날짜 칸에 코털만 한 작대기를 하나 그었습니다. 그것은 ‘획’이었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에도, 이미 다른 날짜 칸에는 수많은 코털 획들이 모여 완성된 바를 정(正)자들이 빼곡했습니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 나는 그 언젠가부터, 남자는 자신이 클라이언트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코털 하나씩을 그려 正을 기록해두고 있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무의미한 행위였습니다. 그저 ‘홍보대행’이라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얼마만큼 “죄송합니다.”를 말했는지 세어보는 일로라도 소소한 재미를 느껴보고자 하는 취지였습니다. 정말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숱한 코털들은 유의미한 것이겠으나, 불운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정말로,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죄송합니다.”를 뱉어냈으며 자동반사적으로 코털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사태의 기원은 남자 자신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남자는 클라이언트라 불리는 수화기 너머의 저 아득한 존재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팀장님, 코털이 하야네요.” 


    사무실 주차장 구석의 흡연 공간에서 사원 하나가 지적했습니다. 두 시간 뒤 클라이언트와 미팅(주간보고)이 잡혀 있는 남자는 뜨끔했습니다. 재떨이에 장초를 비벼 끄고 남자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노르스름한 조명을 받아 남자의 얼굴은 몽타주처럼 음영이 도드라져 있었습니다. 코털이 하얗다는 지적은 진짜였습니다. 입을 씰룩거려보니 과연 새하얀 코털 하나가 인중에 닿을 듯 말 듯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미팅 준비 때문에 어젯밤 손톱을 가지런히 깎은 남자였습니다. 안 그래도 뭉툭한 손가락으로 실 같은 코털을 잡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손톱이라도 길면 훨씬 쉬웠을 텐데···, 남자는 생각하며 흰 코털을 잡기 위해 계속 시도했습니다. 스트레스에 따른 신체 변화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피부 트러블, 또 누구는 장 트러블, 또 누구는 위 트러블, 또 누구는 탈모 트러블. 남자의 경우는 피지가 급속도로 샘솟았습니다. 오후 두세 시경 남자의 피부는 마치 메이크업이라도 한 듯 심각하게 번들거리고는 했습니다. 지금 남자는 새로운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었습니다. 콧속에도 피지가 낄 수 있다는 걸. 흰 코털은 미끄러워 어지간해서는 잡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누로 손을 씻어 수건과 건조기로 물기를 말끔히 제거하여 손가락을 빳빳하게 만들었음에도, 흰 코털은 엄지와 검지 틈에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코안을 비누로 씻어볼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담배를 다 피운 아까 그 사원 하나가 화장실로 들어왔습니다. 거울로 콧구멍을 들여다보던 남자에게 사원은 오줌을 누며 이런 걸 알려줬습니다. 샤프펜슬 끝을 라이터로 달군 다음에 코안에 잘 집어넣어서 코털을 지지면 된다고. 사원의 체내에서 배출된 암모니아 냄새가 남자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코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 만큼 톡 쏘는 향이었습니다. 사원은 마치 큰 배려라도 하는 양, 손은 이따 씻어야겠네, 혼잣말하고는 날렵하게 지퍼를 올리며 화장실을 나갔습니다. 남자는 사원 녀석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셔츠 포켓에 꽂아둔 샤프펜슬과 바지 주머니 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팀장님, 코 밑이 빨가네요.” 


    하마터면 남자는 또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뻔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대학생 인턴이라며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의 여직원과 동석해 있었습니다. 공기업 직원들은 대체로 말쑥한 옷을 선호하는가보다, 남자는 생각했습니다. 남자와 동갑내기인 클라이언트도 깔끔한 캐주얼 정장을 입고 나왔습니다. 남자 역시 평소에 옷 꽤 입는다는 평을 들어 스타일링에는 나름의 일가견이 있지만, 오늘은 예외였습니다. 

    “셔츠에 그 까만 구멍은 불에 탄 거예요?”


    아, 뭔가 작업을 하다가 살짝 코를 데었습니다, 셔츠에도 살짝 불똥이 튀었어요, DIY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었거든요, 라고 남자는 해명했습니다. 그러고는 준비해온 주간보고 자료들을 주섬주섬 테이블에 펼쳐놓았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가는 동안 대학생 인턴은 다소곳한 자세로 가만히 남자의 행동을 응시했습니다. 많아야 스물셋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30대 중반의 핸섬한 클라이언트와 함께 화사한 투 샷을 연출해내고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려고 일부러 팀장님 사무실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다른 큰 프로젝트를 맡는 바람에, 팀장님도 아시겠지만 요새 입찰 시즌이라서요, 아무튼 오늘 같이 온 이 친구한테 자잘한 업무들은 인수인계를 해주고 있거든요. 앞으로는 보고만 저한테 하시고 나머지 실무는 이 친구랑 일하시면 됩니다. 좀 크다 싶은 건들은 제가 처리할 거고요.” 


    남자는 그제야 여자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찬찬히 훑어 보았습니다. 눈은 동그랗고 외겹, 코는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콧대가 선명히 두드러지며 코끝은 너무 뾰족하지도 둥글지도 않게 마감되어 있었습니다. 흰 피부에서는 엷은 분홍빛이 돌고, 이따금 뾰루지 한두 개가 포착되지만, 그것들은 ‘이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 알게 모르게 여자의 얼굴 안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문득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다시 팀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까 2시쯤 전화로 말씀하셨던 수정 자료는 여기 이 친구 메일로 보내시고요, 참조로 제 주소 걸어주시고요.” 


    그렇게 말하고 클라이언트는 남자가 가져온 주간보고 자료 한 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A4용지 다섯 장을 스테이플러로 붙여놓은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부랴부랴 나머지 한 부를 집어 여대생 인턴에게 직접 건넸습니다. 여자는 어깨를 움츠린 자세로 두 손을 뻗어 자료를 받았습니다. 


    “주간보고도 이면지 쓰시나 보죠?” 


    종이를 넘기던 클라이언트가 시선을 여전히 종이에 둔 채 말했습니다. 네? 이면지요? 놀란 남자는 무슨 상황인가 싶어 클라이언트가 손에 쥔 주간보고 자료를 살펴봤습니다. 애초에 남자는 주간보고를 딱 두 부만 출력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대생 인턴이 동석한다는 걸 몰랐으니. 이면지로 뽑은 것은 남자용, 새 종이로 뽑은 것은 클라이언트 제출용. 남자는 지금 두 부를 전부 클라이언트와 여대생에게 건넨 상황이고, 하필 이면지로 출력한 자료가 클라이언트 손에 들어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다시 코털을 생각했습니다. 正, 正, 正, ···. 

    “아니, 뭐, 상관은 없어요.” 

    클라이언트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꾸하고는 신중히 주간보고에 적힌 실적 수치들을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감사했습니다. 

    “메일로 보내주실 때는 오타랑 날짜 틀린 부분 수정해주시는 거죠?” 

    지금껏 인물화처럼 묵묵히 정자세로 앉아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어? 오타가 있어? 날짜가 어디가 잘못됐는데?” 

    팀장이 묻자 여자는 어느샌가 테이블에 꺼내놓은 자신의 몽블랑 펜으로 팀장의 주간보고 자료에 꼼꼼히 오타와 틀린 날짜를 표시해주었습니다. 


    “아하, 여기랑 여기랑 여기. 세 군데구나. 오키.” 

    클라이언트는 인턴의 몽블랑 펜이 헤집은 주간보고 자료를 손으로 집지도 않고 그대로 남자 쪽으로 밀었습니다. 테이블 표면에 누군가가 흘려놓고 닦지 않은 커피 액상이 종이에 들러붙어, 자료 한 면이 찢긴 채로 남자에게 밀려왔습니다. 분명히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클라이언트는 상관없다는 듯이 힘껏 자료를 밀었습니다. 


    “한 번에 딱 가면 참 좋은데.” 

    종이가 한 번에 딱 밀려가면 좋겠다는 뜻인지, 주간보고 컨펌이 한 번에 딱 끝나면 좋겠다는 뜻인지 남자는 궁금했습니다. 물론,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라이언트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더니 상체를 남자 쪽으로 수그리고는 여자 인턴의 몽블랑 펜 표시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바로 되죠?” 

    바로 되느냐고 묻는 건, ‘지금 바로 해 오라는’ 건지 ‘오늘 안으로 해서 메일로 보내라는’ 건지 확신이 안 선 남자는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도움(이라기보다는 해석)을 구하고자 여자 인턴 쪽을 쳐다봤는데, 내내 무표정이던 여자 인턴은 그제야 비로소 웃음을 지었습니다. 웃음을 짓고는, 더 말이 없었습니다. 남자는 ‘지금 바로 해 오라는’ 뜻인 걸로 알고, 주간보고 자료를 챙기며 말했습니다. 

    “바로 수정해서 다시 뽑아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클라이언트는 여전히 상체를 남자 쪽으로 향한 채였습니다. 

    “네, 네, 그러세요.” 


    수정을 위해 자신의 자리로 가려는데, 남자의 눈에 뭔가가 포착됐습니다. 아주 작고 얇고 까만 무엇이었습니다. 남자의 눈은 그 미세한 피사체를 재빠르게 잡아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코털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쭉 뻗은 콧날 하단에 얄따랗게 삐져나온 그것. 남자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저 잘생긴 코안에서도 역시 코털은 삐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미팅 전, 라이터로 달군 샤프펜슬로 지졌던 자신의 흰 코털과 클라이언트의 새카만 코털을 비교해보았습니다. 괜히 기분이 나아진 남자는 주간보고 자료 수정을 위해 힘차게 자리로 갔습니다. 



    ※ 쓴 사람의 말: <을로페셔널> 많이 사랑해주시면 2부도 나옵니다. 연재도 합니다. 








    yoontalk happy_end@naver.com
    (주)윤디자인연구소 공식 블로그 '윤톡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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