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출신 최연소 임원 자살 '업무상재해'로 본 이유

2015-09-0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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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com (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많이 힘들다…나 좀 안아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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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많이 힘들다…나 좀 안아줘'

남편이 이상해진 건 2012년 7월 무렵부터였다. 평소 TV는 거들떠도 안 보던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혼자 드라마를 연달아 봤다. 갑자기 모아 둔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나오는지를 물었다.

출근하기 전에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표를 내고 싶다며 회사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부인에게 너무 힘들다면서 안아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집에 빚이 있는 것도,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달쯤 지난 8월10일, 남편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사무실이 아닌 아파트 14층 난간이었다. 오전 7시30분께 남편의 몸은 땅을 향해 떨어졌다.

유서는 없었다. 대신 처남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아이들하고 처를 잘 부탁한다."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LG유플러스에서 '최연소 상무'까지 달았던 A씨는 그렇게 숨졌다. 겨우 46세였다.

◇ 5년 빨리 상무 달았지만…실적부진 책임 집중

A씨는 대학을 마친 1989년부터 LG 인터넷·통신 계열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2004년 LG파워콤에 영입됐다. 자신을 점찍어 데려온 그 회사 임원은 2006년부터 대표이사에 올랐다. A씨는 큰 신임을 받으며 사내에서 승승장구했다.

2010년 LG텔레콤이 LG파워콤과 LG데이콤을 흡수합병해 LG유플러스를 출범시키며 A씨도 LG유플러스로 편입됐다. 그는 그간 성과를 인정받아 입사와 동시에 상무로 발탁됐다. 상무 중엔 최연소였다. 평균보다 4∼5년은 빠른 경우였다.

IPTV라는 새로운 분야를 책임지게 된 A씨는 고군분투했다. 하루 평균 13∼15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주말에는 거래처 접대를 위해 골프 모임에 갔다. 골프 모임이 없으면 출근해 일을 챙겼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2010년과 2011년 매출은 괜찮았지만 초기 투자비용이 너무 많아 영업손실이 발생했다. 흑자 전환을 꾀하던 2012년엔 SK텔레콤, KT와 경쟁에서 뒤처지며 시장점유율이 점점 떨어졌다.

상황 타개를 위해 LG유플러스는 '실적 두 배 증가 운동'을 벌였다. 2012년 3월 89만명인 가입자를 그해 말까지 200만명으로 늘리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가입자는 7월 말까지 95만명에 그쳤다. 부진을 탓하는 화살은 A씨에게 집중됐다.

그를 괴롭히는 건 비단 실적만이 아니었다. 세 회사가 모인 LG유플러스 내에선 파벌이 형성됐다. 가장 큰 세력은 합병의 본류인 LG텔레콤 출신이었다. A씨 같은 LG파워콤 출신들은 LG텔레콤 출신 때문에 각종 불이익을 받는다고 느꼈다.

특히 A씨를 발탁한 LG파워콤 전 대표이사는 A씨의 직속 본부장으로 있다가 2012년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LG텔레콤 출신의 새 본부장은 A씨를 배제하고 A씨 밑 팀장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내렸다. 시간이 갈수록 파열음은 점점 커졌다.

◇ 훈장 받게 되자 최고 경영진 불쾌감 표시…"군중 속의 고독"

그러던 중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2012년 4월 방송통신위원회가 국내 IPTV 가입자 500만명 달성을 기념해 A씨에게 동탄산업훈장을 주기로 한 것이다. A씨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방통위가 결정한 일이었다.

새 본부장은 본부 공식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회장님이 '대표이사에 앞서서 상무직급에 있는 A씨가 훈장을 받는 것이 불쾌하다. 훈장을 취소하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조직이 A씨에게 내리는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다.

A씨는 그 이후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회의를 들어가도 주도를 하지 못했다. 공황장애가 온 거 같다고 했다. 주위 사람에게 "사는 것이 재밌느냐"며 "그동안 회사와 집만 다니고 취미나 다른 일이 20년간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사내 소문은 빨랐다. A씨는 과거 친했던 동료들이 자신을 멀리하고 등을 돌린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사내 이메일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A씨는 목숨을 끊었다. 오전에 사장단 업무보고가 있던 날이었다. 회사 측은 "A씨는 영업부문 상무가 아니라 실적 압박은 크지 않았다. 전날 밤 부부가 심하게 다퉜다고 들었다"고 언론에 밝혔다. 그는 그렇게 회사에서 잊혀갔다.

유족은 그의 죽음이 회사와 연관 없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공단은 "그 정도 업무 부담이나 실적 압박은 일반적인 직장인 수준"이라며 지급을 거부했다.

유족은 결국 소송을 냈다. 사건을 맡은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김병수 부장판사)는 1년이 넘는 심리 끝에 지난달 21일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가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생긴 상황에서 자살한 것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판결문은 선고 5일 후 유족에게 도착했다. 거기엔 A씨의 마지막 모습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일과 집밖에 모르던 두 아이의 아빠가 왜 가족을 뒤로하고 뛰어내려야 했는지에 대한 공식 설명이었다. A씨가 사망한 지 3년하고도 16일이 더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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