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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자전거 여행 - 지금도 사람 사는 560년 된 고택!

    • • 경주 자전거 여행 - 560년 된 고택,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
    ‘물(勿)’자 모양의 산마을, 경주 양동마을은 거닐면 거닐수록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 이하 김종성
     

    경주 양동마을(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은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반촌(班村 : 조선시대 양반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마을)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먼저 안동 하회마을을 몇 번 가보곤 '양동마을도 비슷하겠지'했는데, 가보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 

    하회마을이 강물이 휘돌아가는 강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한 산마을로 풍광이 사뭇 다르다. 마을 지세가 평평한 땅이 아니라 '물(勿)'자 모양이다. 마을 뒷산격인 설창산의 산줄기가 '물(勿)'자 모양으로 내려와 능선을 이루고, 능선이 이루는 여러 골짜기들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다.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마을 바깥에서는 마을의 전체적인 규모나 가옥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덕분에 마을길을 거닐면 거닐수록 흥미로움을 더해 준다.

    양동마을은 마을 자체의 이야기와 풍경도 좋은 데다, 동해 남부선 안강역이라는 소담한 시골 기차역이 있어 기차 여행 삼아 가면 더욱 좋겠다. 더군다나 100여 년 역사의 양동초등학교, 시골 오일장으론 무척 크고 풍성한 안강읍 닷새장이 이웃하고 있어 여행하기 좋은 마을이다. 양동마을 앞까지 주민을 태워줬던 간이역 양자동역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시대에 밀려 쓸쓸한 폐역이 됐지만 양동마을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곳이다.


    소읍 전체가 북적이는 시골 닷새장, 안강 오일장 

    지난 14일 형산강 변을 따라 경주역과 포항역 사이를 달리는 동해 남부선 열차를 타고 안강역(경주시 안강읍 안강리)에 내렸다. 안강 닷새장 구경 나온 뒷짐 진 인근 동네 주민과 함께 역으로 들어섰다. 

    승차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펼쳐지는 한적한 시골역 풍경에 마음이 아득해져 벌써부터 안강읍 동네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자 이름 '안강(安康)'처럼 편안하다는 글자가 두 개나 붙은 역답다. 안강읍 동네 지명은 무려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지었단다. 

     

    1918년 11월 1일 철도 업무를 개시한 안강역. 낼 모레면 100살이다. 아담한 대합실에 여러 권의 책과 집 거실에서 쓰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작고 낡았지만 단정하고 정감 가는 역이다. 유년 시절 방학 때마다 찾아가면 마을 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주름 가득한 미소로 손주를 반기곤 했던 외할아버지 품 같았다. 

    동해 남부선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굴곡의 기찻길이 이어지는 철길이다. 산을 만나면 자연스레 돌아가고, 강을 만나면 휘돌아 굽어가는 노선이다. 이제 동해 남부선도 전국적인 복선 전철화 사업에 따라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2018년 약 2km 떨어진 곳에 강변을 따라 철길이 놓이고 새로운 안강역이 생긴다니 섭섭하다. 

    이젠 한낮의 햇살도 타는 듯 뜨겁게 느껴지지 않아 어느 때보다 가볍게 애마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타고 안강읍을 향해 달렸다. 소담한 시골 기차역 분위기인 안강역과 달리 안강읍 닷새장(매 4일, 9일)은 동네 전체가 장터로 변한 것처럼 크고 북적여 깜짝 놀랐다. 상설 시장인 안강시장은 1923년 7월 개장한 오래된 장터지만 현재는 지붕이 있는 아케이드 시설까지 갖춘 신식 시장이었다.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엔 농사용부터 가정용까지 별별 칼, 가위를 다 가는 아저씨, 달마대사를 닮은 아저씨가 하는 달마 대장간, 도장 파는 할아버지 등 아직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활력이 넘쳐서 좋았다. 안강 들녘에서 나온 농산물은 물론, 형산강이 가깝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포항과 가까운 거리라 그런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도 가득했다. 일전에 가본 남도 제일의 닷새장 순천 아랫장에 버금가는 오일장이 아닐까 싶다. 

    역사가 오래된 장터에서 맛볼 수 있는 큰 가마솥에서 갓 튀겨낸 장터 통닭이 맨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한 마리에 5천 원이라니 배고픈 자전거 여행자에겐 더 없이 좋은 한 끼 식사. 갖가지 양념이나 향신료도 없이 튀김 가루를 입힌 튀긴 닭에 작은 소금 한 봉지가 전부지만, 야외 통닭집 옆으로 줄이 이어졌다. 포항에서 장날 구경을 왔다는 부부, 친구들과 장날 '정모' 중인 할아버지들과 함께 야외 탁자에 앉아 통닭을 기다렸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튀겨낸 닭의 톡톡 튀는 바삭거림과, 부드럽고 담백한 속살은 흡사 돈가스를 먹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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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한 양념이나 향신료 없이도 돈가스 맛이 나던 가마솥 통닭.
    ⓒ 김종성



    고소한 풍미는 그 유명하다는 안강 참기름집 못지않았다. 탁자에 앉아 통닭을 뜯으며 보니 닭집 아저씨는 꼭 6마리씩 닭을 튀긴다. 한꺼번에 많이 튀겨놓으면 편할 텐데 왜 여섯 마리씩만 튀겨 놓을까 궁금했다. 너무 많이 튀겨서 쌓아두면 사람들이 장사가 안 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고, 식어서 맛도 없어진단다. 또 적당히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장사에 도움이 된다며 튀김옷을 입힌 통닭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들어 보이며 가마솥에 담근다. 

    시장통 작은 공간에 앉아 직접 손으로 문패와 도장을 파는 할아버지도 반가웠다. 평생을 매만져온 작은 도구들이 할아버지의 굽은 손가락과 어우러져 작품 같은 문패와 도장이 탄생하는 과정은 볼수록 흥미로워 아예 그 앞에 주저 앉아 구경을 했다. 젊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게 기특했는지, 할아버지는 도장이나 문패에 들어갈 한자인 행서체, 예서체, 초서체 등 여러 문체를 백지에 멋들어지게 써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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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세월 아저씨와 함께한 도구들과 손가락이 서로 닮았다.
    ⓒ 김종성



    1970, 1980년대엔 일본 오사카로 출장까지 가서 문패와 도장을 팠는데, 그때가 기술자로 대접도 받고 좋은 시절이셨단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기계나 '콤퓨타(컴퓨터)'로 도장이나 문패를 파게 되면서 기술자들이 사라졌다고. 특히 인감 도장 같이 중요한 도장을 많이 팠는데, 사람이 파낸 도장은 똑같은 게 없어서 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했단다.

    어른들과 함께 나온 아이들에게 닷새장터의 인기는 단연 가축장이다. 특히 애완용 개를 파는 곳엔 강아지들과 구분이 어려운 꼬마 녀석들이 모여 있었다. 어른들도 강아지들이 귀여워 저마다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데, 상인 아주머니들이 별로 탐탁치 않아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바로 옆에 시뻘건 살코기가 놓여있는 개고기 좌판이 있어서였다. 관습이나 인습이 그렇듯 오래된 식습관 또한 쉬이 사라지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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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일장날은 동네 할배들의 장기판이 펼쳐지는 날이기도 하다.
    ⓒ 김종성



    시골 장터가 맞긴 맞구나 싶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시골 마을 깊숙한 곳에 식용으로 개를 키우는 개 농장을 자주 목격했다. 인간의 반려자에 준하는 반려견의 지위에 올라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개는 식용이나 가축으로 키우기엔 너무 활동적이고 충성스럽고 지능이 높다.  

    벌써 막걸리 한 사발 취기에 길섶에 누운 할아버지, 훈수 두는 사람들까지 대 여섯 명이 유명한 대국판 못지않게 진지한 얼굴로 몰입 중인 장기판... 이를 뒤로 하고 마을 길, 안강 들녘, 개천 길 따라 양동리 양동마을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시끌벅적했던 안강읍과 달리 양동리 가는 시골 길은 더없이 한가롭고 고즈넉했다. 천변길 풀벌레 소리만 들으며 달리다가, 논밭을 돌보러 나온 농사꾼 아저씨가 반가워 괜히 모르는 척, 길을 잃은 척 양동마을 가는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하천 둑길 너머로 자리한 양동마을과 자연스럽게 흐르는 형산강 줄기, 넓은 안강 뜰이 펼쳐져 있다. 이 하천은 옛날 소금배가 올라왔다는 안락천이다. 양동마을은 형산강, 안락천, 기계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풍수에 따르면 합수 지역은 부를 상징한단다. 양동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약 500년 전 조선 초기다. 양동마을에 살던 옛사람들의 모습과 들판을 내려다보던 양반들, 그리고 들녘을 가꾸던 하인들의 부지런한 움직임... 수백 년 전의 풍경이지만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아련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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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산강과 그 지천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한 양동마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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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전거를 타고 마치 주민인양 마을을 거닐었다.
    ⓒ 김종성



    경주에서 조선을 만나다

    양동마을 입구에 웬 기와집 지붕을 한 학교가 있다. 1913년 개교한 100년 역사의 양동초등학교다. 수위 아저씨 대신 고목나무가 지키고 서 있는 교문으로 들어서자 유서 깊은 마을과 어울리게 기와지붕을 인 단층 교실들이 가로로 길게 이어져 있다. 

    소도시, 소읍 어디나 폐교한 초등학교가 흔한 요즘, 한옥집처럼 외관을 개조하고 당당히 마을 앞에 자리한 학교의 모습에 마음이 든든했다. 동네에 학교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보기 드문 마을은 더 쓸쓸해 보여서다. 양동마을 안에는 이 초등학교의 전신이면서 서당 역할을 한 심수정(1560년 건립)과 안락정(1780년 건립)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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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동마을 초입에 있는 100여 년 역사의 양동 초등학교의 이채로운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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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동마을 주민들이 가꾸고 있는 작은 텃밭.
    ⓒ 김종성



    양동마을 여행은 입구 매표소에서 운영하는 문화 해설사와 함께하면 더욱 풍성해진다. 양동초등학교를 다녔던 마을 주민이기도 한 나이 지긋한 분이 마을 언덕 초입까지 함께 걸으며 30~40분간 양동마을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마을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것도 무료로 들려주니 여행자로선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다. 

    양동 마을은 월성 손씨(孫氏)와 여강 이씨(李氏)의 두 가문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양반 마을이다. 15세기 중반 조선 시대 문신 손소(孫昭)가 이 마을로 이주하고, 이번(李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오늘과 같은 양성 씨족 마을의 틀이 갖춰졌다. 이런 배경으로 '외손 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 지금처럼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게 아닌 '남자가 장가를 가는' 모계 사회의 관습이 조선조까지 남아 있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중종 때 성리학자 이언적(1491~1553)이 있다. 이언적은 '동방오현'(東方五賢)중 한 사람이다. 동방오현은 조선 시대 성리학, 즉 도학(道學)의 선구자라는 뜻이다. 이언적 선생이 1610년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모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원래 이름은 이적이었다.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선비 彦)자를 붙여주었을 정도로 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고. 

    이곳에는 현재 150여 채의 조선 시대 가옥이 남아있으며 그 중 관가정, 무첨당, 향단, 서백당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보물같은 고택들이다. 은행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 나무들도 고택만큼이나 고색창연한 기운을 뿜으며 마을을 아름답게 하고 있었다. 편편한 대지가 아닌 물(勿)자 형으로 난 언덕과 골짜기 사이로 들어선 집들과 마루, 나무, 텃밭, 마당은 더없이 푸근하고 거닐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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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0년 된 가장 오래된 살림집, 서백당의 사랑채 누마루와 사당.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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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가집의 오랜 역사를 전하는 노거수 향나무.
    ⓒ 김종성



    보존 가치가 높은 중요 민속 자료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마을이었다. 마을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우리나라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이곳 양동마을 뿐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이곳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라고 한다.

    500년 역사의 양동마을과 마을 앞 안강 들녘은 지금도 예전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양동마을이 오래도록 우리 전통 마을의 면면을 고스란히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임진왜란부터 6.25 전쟁의 화마를 운 좋게 피해간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문화 해설사는 여기 모여 살던 옛 선비와 학자들의 학구열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일 거란다. 안락정이나 강학당 같은 옛 학교들이 이를 입증한다. 많은 학자와 선비가 이 마을에서 배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마을길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 뒤를 따라 나도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분들이지만 어찌나 다리 힘이 좋은지 웬만한 언덕쯤은 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도 올라가신다.  마을 길 외에도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 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걸을 때보다 살짝 시선이 높은 자전거 안장 위에서 보이는 집집 풍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옹기 굴뚝의 풋풋한 자연미, 사당 앞 향나무의 단아하고 엄숙한 분위기, 둥근기둥과 조화를 이루는 안채의 대청마루, 사랑채 마당의 예쁜 꽃과 문간채 기왓골의 어울림, 탁트인 'ㅁ'자형의 안채에 남아있는 우물터... 무엇하나 자연스럽지 않고 인간미 넘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옛 선비들이 추구했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분위기 그대로였다. 


    마을 앞 들녘과 하천이 내려다 보이는 고택 관가정.
     

    백 번을 참고 또 참아내야 했던 종가댁, 서백당

    마을 길을 거닐다 만나는 여러 고택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은 집이 있다면 바로 '서백당'이다. 우리 옛 조상들은 사람 이름을 좋은 뜻의 글자로 짓듯이 집에도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당호다. 양동마을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서백당은 양동마을에 있는 월성 손씨 집안의 종택이다. 입향조인 손소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 청송 본가에서 처가가 있는 양좌동으로 들어오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성종 15년에 지어졌으니 서기로 환산하면 1454년,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에 지은 집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집 가운데 남은 집이 손가락으로 세면 몇 개가 남는다고 하니 참 귀한 집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아직도 살면서 마당 쓸고 마루 닦고, 사랑채 마루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는 집이니 더욱 더 귀한 집이다. 서백당(書百堂)이라는 집의 이름도 '하루에 백번을 참을 인(忍) 자를 생각하며 살면 행복이 오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뜻을 지녔다고. 손씨 집안을 지키는 대종가(시조의 제사를 받드는 제일 큰 종가)의 종손이라면 그만큼 온갖 어려운 일들을 참고 집안의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는 당부의 뜻이리라. 

    서백당의 만만한 문턱을 넘어서면 마당에 남녀가 내외하는 경계라는 낮은 '내외담'이 보이고, 그 옆으로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으로 가는 마당에 살고 있는 560살이 넘은 커다란 노거수 향나무는 단연 이 집의 상징이다. 용트림하듯 뒤틀린 특유의 신묘한 몸체 또한 집 당호처럼 참고 또 참고 인내해서 그런가 싶다. 향나무는 반드시 사당 앞이나 선비들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노인의 주름처럼 깊이 패여 연륜이 깊어 보이는 향나무는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고목 향나무 때문일까, 집이 으리으리하지 않지만 집 곳곳이 정갈하고 기품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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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에 번개까지 맞은 은행나무의 생명력이 놀랍다.
    ⓒ 김종성



    마을에선 선비수,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도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조선 시대 우리 민족이 선호하던 나무의 하나로 정자나 공부하는 장소에는 한두 그루씩 꼭 심어져 있었다.  

    양동마을에는 특이하게도 관가정, 수운정, 안락정 등 무려 10여 개의 정자들이 있어 하나하나 들리며 정자에 앉거나 누우면서 쉬어가는 재미도 즐겁다. 옛 정자는 단순히 쉬어가거나 여흥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강연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정자에 온돌방이 있고 부속 건물도 있다. 마을 언덕 아래 자리한 초가집들은 기와집 일색의 한옥 마을과는 또 다른 정경을 보여주었다. 특히 푸근한 동네 뒷산을 닮은 초가 지붕은 짚 자체가 지닌 자연스러움으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지붕 위를 타고 올라가는 호박 넝쿨은 어찌나 정겨운지 담장 위로 오르고 싶을 정도였다. 

    형산강과 안강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풍광 좋은 언덕 위 고택 '관가정' 앞, 무려 500살이 넘었지만 장대한 풍채의 은행나무가 이상하게 뒤틀리고 갈라져서 시선이 머물렀다. 지나가는 동네 주민이 내 시선을 따라 나무를 보더니 몇 해 전 큰 태풍이 불었을 때 그만 번개를 맞았단다. 

    그런데도 가지에 푸른 잎이 풍성하게 돋아나 있어 놀랐다고 했더니 가을에 은행 열매도 맺는단다.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의 생명력은 참으로 놀랍다. 양동마을에는 유독 은행나무 숲이 울창하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이 나무 아래서 강학하였다는 '행단(杏壇)'에서 유래한 것으로 향교, 서원, 고택 정자 등에는 꼭 은행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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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벌레 소리 들려오는 저녁녘 시골 기차역, 안강역.
    ⓒ 김종성



    양동마을에서는 민박이나 전통체험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것이 생활예절과 문화유산에 대해 배우는 유교문화교실. 이 시간을 통해 인사하는 법, 손님 맞는 법 등등의 생활예절을 배울 수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철없는 어른들도 배울 만하다. 이외에 엿 만들기, 식혜 만들기 등도 인기 있는 체험이라고.

    양좌동에서 양자동으로 바뀐 마을 이름 

    마을 문화 해설사에게 기차를 타고 안강역에 내려 양동 마을까지 찾아왔다고 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폐역이 됐지만 마을 앞에 있는 양자동역(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한 번 가보라고 하신다. 이 간이역은 1967년 9월 영업을 시작했다가 1987년 4월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 2007년 여객 취급을 중단하면서 폐역이 되었다. 

    양자동역은 처음부터 역 건물이 없었단다. 지금처럼 철로 변에 지붕을 얹은 플랫폼과 의자가 전부였으며, 철길 아래 구멍 가게에서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고. 현재는 새롭게 설치된 파란색의 역명판만이 이곳이 양자동역임을 밝히고 있었다. 시대와 속도에 밀려 버려진 폐역은 스님의 잔잔한 독경 소리, 낭랑한 목탁 소리가 사라진 폐사지(廢寺址 : 버려진 옛 절터)의 적막함과 허망함을 닮았다. 

    양자동은 양동마을의 옛 이름으로 본래 양좌동(良佐洞)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양자동(良子洞)으로 바뀌었단다. 어진 임금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뜻을 왜곡해 버린 것이다. 야구나 예술분야에서 빛을 발했던 일본인의 '디테일', 식민지 조선에선 개탄의 대상이었다. 

    사람 이름처럼 창씨 개명해봐야 후일 제 이름을 찾을 걸 예상했는지, 원래 지명이나 명칭을 교묘하게 고치고 왜곡한 경우는 전국적으로 흔한 일이다. 이런 일을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 한다. 

    경주를 지난 동해남부선 철마는 형산강 옆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며 달린다. 넓은 안강평야를 지나 강을 건너자마자 이곳 양동마을을 만난다. 지도를 보면 철길이 이 마을 앞에서 크게 우회전하면서 산을 감돌아 지나간다. 일제 강점기 때 개설된 동해 남부선 철길은 원래 이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개울을 따라 부설하도록 계획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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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좌동 마을에서 일제가 왜곡해 고친 양자동, 1967년 생겨난 간이역 이름에 그대로 남았다.
    ⓒ 김종성



    그러면서 양동마을 선비들이 풍수 상 중요하게 여겼던 봉우리가 붓처럼 생긴 동네 뒷산(안산)의 '문필봉'을 뭉개며 철도를 만들려고 했단다. 이에 반대하는 동네 원로 어르신들이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까지 찾아가 3일간 항의한 끝에 결국 현재의 길로 철도가 들어섰다고. 한반도 백두대간마다 찾아가 쇠말뚝을 심은 것에서 보듯,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인재가 나지 않도록 별별 수단을 다 썼구나 싶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마을 앞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는 이 마을의 지형이'물(勿)'자 모양의 길지여서 마을 정면에 학교를 세워'혈(血)'자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광복 후 아니 지금까지도 권력층, 기득권층에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걸 보면 과거 일제의 치밀한 술수가 빛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 김종성 http://sunnyk21.blog.me 



    써니21 sunnyk21@naver.com
    금속말을 타고 다니는 도시의 유목민 써니2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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