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호는 언제, 어떻게 정해졌을까? 또 논란

2019-08-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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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의원 “'1945년 국호 정해지지 않은 시점' 발언으로 논란 다시 촉발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헌장에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제 74주년 광복절인 15일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해 김 구 선생 흉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자유한국당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제 74주년 광복절인 15일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해 김 구 선생 흉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자유한국당

최근 정치권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시기를 놓고 또 한 번 논란이 벌어졌다.

이번에 관련 논란을 촉발시킨 장본인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였다.

나 원내대표는 광복절인 지난 15일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광복군 총사령부 등을 방문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1945년 광복된 해를 두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고 언급해 이 논란에 불을 붙였다.

나 원내대표의 이런 언급은 '건국절' 논란과도 직결된 것이어서 정치권에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는 진보 진영에서는 즉각 반박이 터져 나왔다.

김성회 정치연구소 ‘싱크와이’ 소장이 대표적이다.

김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최초의 헌법인 임시헌장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칭하고 정치체제는 민주공화제로 정했다”며 “임시 정부가 선포한 최초 헌법을 인정하는지 나(경원) 의원은 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초청해 지난 2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과의 간담회장 배경으로 1945년 11월 3일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청사를 떠나기 20일 전에 연화지 청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김구 선생(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바로 뒷줄 오른편이 임시정부 시절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했던 조소앙 선생이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초청해 지난 2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과의 간담회장 배경으로 1945년 11월 3일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청사를 떠나기 20일 전에 연화지 청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김구 선생(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바로 뒷줄 오른편이 임시정부 시절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했던 조소앙 선생이다/ 연합뉴스

김 소장의 말대로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공포한 최초의 헌법격인 '임시 헌장'에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비록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그때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 김 소장의 주장이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반포한 1919년에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졌다고 봐야한다는 지적 때문이다.

반면 독립국가로서 대한민국의 국호가 정해진 것은 1948년 제헌국회였으므로 나 원내대표의 발언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나 원내대표는 광복절인 지난 15일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충칭에 왔다며 사진과 함께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 의원은 “74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강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쁨을 맞이함과 동시에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도 함께 맞이했다”며 “아니,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조차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고 적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대한민국의 국호가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냐는 반박이 제기됐다.

김성회 정치연구소 ‘싱크와이’ 소장(전 손혜원 의원 보좌관)은 페이스북을 통해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최초의 헌법인 임시헌장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칭하고 정치체제는 민주공화제로 정했다”며 “임시 정부가 선포한 최초 헌법을 인정하는지 나 의원은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반포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학원 교수의 저서 ‘100년의 헌법’에 따르면,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호를 놓고 수뇌부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논의 탁자 위에 오른 국호 후보는 대한민국을 비롯해 ‘신한민국’, ‘한양정부’‘, ’조선공화국‘ 등으로 다양했다.

임시 정부의 국호로 대한민국을 제안한 이는 당시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이었던 삼균 조소앙 선생이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 등 임시정부 수뇌부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국호를 반대하기도 했다.

망국의 국호인 '대한제국'이 연상된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결국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뇌부들은 여러 국호 후보를 놓고 투표에 부쳐 대한민국으로 최종 결정했다.

따라서 김 소장의 주장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 원내대표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2016년 1월 14일 세종시에 개관한 대통령기록관 4층 전시관에 전시된 제헌헌법 필사본 / 연합뉴스 자료 사진
2016년 1월 14일 세종시에 개관한 대통령기록관 4층 전시관에 전시된 제헌헌법 필사본 / 연합뉴스 자료 사진

광복 후 1948년 8월 15일 수립한 독립국가 국호는 1919년에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썼던 '대한민국'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일치할 뿐 제헌국회에서 새로 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달리 말하면 1945년 광복 후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때까지 미 군정기 3년 동안은 우리나라는 공식 국호가 없었던 셈이다.

1948년 5월 출범한 제헌국회 당시 헌법기초위원회의 가장 무겁고, 시급한 숙제가 국호를 새로 정하는 문제였다.

이 때도 새 국호 후보로 '대한민국'을 비롯해 '조선공화국' '고려공화국' 등이 올라왔다.

광복 후 새 정부의 국호 역시 지금도 우리 헌법 전문에 명기된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우세해 결국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이 때도 헌법기초위원회 위원들이 투표를 해서 다수결 원칙에 따라 국호를 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을 1919년 임시정부를 출발점으로 보고 올해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양하게 벌이고 있다.

반면 이먕박, 박근혜 정부 때는 똑같이 1948년 독립국가 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원으로 삼은 것과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는 이 두 가지 시각의 차이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의 뿌리이기도 하다.

home 윤석진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