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2장-5 어린 신동(神童)의 첫사랑

2010-04-1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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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는 사랑을 하게 되면서 여린 소녀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

난이는 사랑을 하게 되면서 여린 소녀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강한 여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제현은 자신의 가슴속에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정열의 불꽃을 끌 수가 없었다. 그는 난이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두 팔로 가녀린 여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난이는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바라던 이제현의 품에 얼굴을 기댄 난이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창포 향기가 나고 있었다.

앵계를 따라 짙게 깔렸던 여름 새벽안개가 걷히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들에 나올 무렵 두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날 밤, 제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두 사람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곤 난이를 두 팔로 감싸 안은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첫 밀회 이후,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가며 새벽에 만나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곤 했다. 두 남녀가 새벽녘에 밀회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월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익어가는 만큼 이제현의 고민도 깊어 갔다.

그리고 두 달이 쏜살같이 지나같다. 이제현은 많은 생각과 번민 끝에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그녀를 자주 만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습관처럼 그녀를 만나 애정의 싹을 키우면 감정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기 때문에 학문 정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제현은 꿈을 이룰 때까지 둘이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린 이제현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붓을 들어 난이에게 심정의 일단을 밝히는 서찰을 한 숨에 써내려갔다.

그리운 난이에게.

그대에게 괴로운 심정을 호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소.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내 운 명은 결정되었소. 나는 당당하게 그대의 남편이 되고 싶소. 아니 될 수 없다면 그대의 종이라도 될 것이오.

그 길은 등과를 하는 일이라 생각하오.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모든 성공을 보장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을 스승님으로부터 배웠지만, 나는 일찍 등과를 하고 싶소. 그 이유는 그대 곁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기 위함이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꿈을 이룰 때까지 우리의 만남을 중지하는 게 어떨까 하오. 일 년이 걸릴지 이삼년 이 걸릴지 아니면 십년 세월을 허송해야 할지 모르지만,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칠월 칠석날 해마다 단 한번 뿐인 만남을 갖는다는 설화처럼 우리도 그때까지 참으며 기다립 시다.

경자년 칠월 칠일. 익재 이제현 씀.

경자년(1300, 충렬왕26) 8월 어느 날. 촛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문도(門徒)들의 긴장된 얼굴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어 있었다.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에는 이따금 긴 탄식에 이은 한숨 소리만 들릴 뿐 모두 손끝에 힘을 주고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이른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일컫는, 촛불을 켜놓고 초가 타내려 가는 일정 부분에 금을 새겨 놓아 그 시간 안에 시를 짓게 하는 일종의 시짓기의 속작(速作)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의 이제현도 승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시구를 짜내고 있었다. 이윽고 아직 초가 반쯤 남아 있을 때, 그는 일어나 자신의 답안을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시험관은 결과를 발표했다. 일등은 역시 이제현이었다. 모두들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학동들이 좌우에 열을 지어 앉았고 술과 안주를 바쳤는데, 모두 들어가고 물러남에 예의가 바르고 연장자와 연소자간의 서열이 분명하였다. 이날 연회는 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까지(戌時:19시-21시) 계속되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이제현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듬해인 신축년(1301, 충렬왕27) 3월. 과거시험날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지공거는 북쪽 의자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동지공거는 서쪽 의자에 앉아 동쪽을 향했다. 감찰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남쪽의 조금 서쪽에서 동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향하여 앉고, 장교(將校)는 깃발을 들고 층계 아래 나누어 서있었다.

이제현은 권보 학당에서 연마한 학문적 소양과 각촉부시에서 닦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응시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재능을 자부하며 서로 우열을 다투었으나, 이제현이 지은 글에 대해 듣고 물러나 움츠리며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였다.

결국 이제현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에 1등(장원)으로 합격했다. 성균시는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던 시험으로 최종 고시인 예부시의 예비고시이다. 그해 이제현은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는 천재 소년이라 불리던 《동명왕편》의 저자 이규보가 네 번 재수 끝에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예부시에 합격한 사실과 대비할 때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때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는 스승이자 나중에 장인이 된 권보였으며, 동지공거(지공거의 보좌역)는 조간, 성균시의 시관(試官)은 정선이었다.

이제현은 다른 급제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천동(天童)을 앞세워 시가행진을 했다. 이때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가 춤을 추며 재인(才人)이 잡희(雜戱)를 부렸다.

삼일유가(三日遊街)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을 말한다. 아버지 이진은 아들을 뽑아준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고, 이어 친척·친지를 불러 문희연(聞喜宴)을 열어 아들의 소년등과를 축하했다.

마지막으로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감사를 드리는 회문연(回門宴)이 권보의 학당에서 열렸다. 동문수학한 선배 동료 학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익재, 최연소 장원 급제를 경하 드리네.”

“저보다 학문이 높은 선배님들이 즐비한데 제가 급제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게지요.”

“익재,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겸양지덕을 배운 이제현은 다시 몸을 낮추어 말했다.

“과거의 문장은 작은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으로 저의 덕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합니다. 앞으로 부족한 학문을 연마하고 덕을 기를 생각입니다. 많은 지도편달과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제현은 이처럼 과거급제에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고전을 토론하고 경전을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당연함에 이르러야 절충하였다.

이런 아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전해들은 아버지 이진은 ‘하늘이 혹시 우리 가문을 더욱 크게 하려는가’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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