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강제폐위' 뉴욕타임스 당시 기사 보니...
2014-03-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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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처 = 뉴욕타임스]"황제는 유럽에 친구가 없었다" 라는 제목의 1907년 7월

[이미지 캡처 = 뉴욕타임스]
"황제는 유럽에 친구가 없었다" 라는 제목의 1907년 7월 20일 뉴욕타임스 기사입니다. 고종이 강제 폐위된 배경을 다룬 짤막한 기사입니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고종의 마지막 분투를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과대평가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참 가슴이 아프군요.
유럽에 친구가 없다.
폐위된 황제, 의도는 좋지만 연약했다. 새 황제도 나아진 건 없다.
런던. 7월 20일 토요일 - 황제(고종)는 오래된 제국(조선)의 지위에 충분히 관심을 둘만한 친구를 유럽에 두지 못했다. 그는 러시아와 늘 가까웠지만, 러일 전쟁의 결과는 그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905년 6월 26일부터 11월 29일(공사관 폐쇄)까지 주한 미국 공사를 지낸 에드윈 모건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싶다는 고종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일본은 고종에게 한국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고종은 크게 낙담했고, 이어진 미국 공사관의 한국 철수는 고종에게 큰 좌절을 안겼다.
고종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의도는 좋지만 연약한 남자로 묘사한다. 그의 아들(순종)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폐위에 대해) 고종을 동정하는 목소리는 외국 신문들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고종이 일본에 맞선 쓸데없는 시도로 자신의 운명을 자초했다고 보고 있다. 데일리 그래픽 지는 농담조로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썼다.
황제 폐위는 한국을 위해선 가장 좋은 일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결국 한국은 지리적 위치상 전쟁의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전쟁(러일전쟁)의 결과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의 완전한 일본화는 이제 시간 문제다"라고 보도했다.
상하이 특파원에 따르면, 폐위된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에 보호를 요청하려 했으나, 일본의 사전 조치로 좌절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