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앞에서 수치심을 견디는 여성들"

2014-10-1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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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투쟁가들의 말처럼 ‘생명과도 같은 일자리’ 앞에서, 자신의 성적 자존감마저 포기해야 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그리고 그런 성(性)을 착취하는 데 아랑곳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잔인무도한가.

일자리 앞에서 수치심을 견디는 여성들

이고은 경향신문 기자

지난 9월 26일, 한 20대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남긴 석 장짜리 유서에는 자신이 지난 2년간 겪은 수모와 고통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정규직 전환을 꿈꾸던 ‘계약직 여직원’이었다. 2012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 인재교육본부 인턴 사원으로 입사한 그녀의 계약기간은 1년. 계약기간이 지난 후 회사는 그녀에게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며 재계약을 제안했다. 계약 기간은 1개월, 2개월, 4개월씩 쪼개서 연장됐다. 계약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하지만 재계약 1년 후 그녀는 해고됐다. 회사가 약속을 깨고 계약을 종료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그녀가 회사 내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렸다는 유서 속 내용이었다. 그녀는 “회식 자리에서 아버지뻘인 기업체 대표가 자신의 몸을 더듬거나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성희롱 발언을 내뱉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만 더 견디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참고 견뎠다. 그 희망은 절망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세상은 크게 분노했다. 정규직 전환을 기다리는 계약직 직원이었던 그녀는 세상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일자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악용해, 성희롱을 일삼은 회사 간부들의 만행은 어떤 잔인한 행동보다도 끔찍한 폭력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여성민우회의 2013년 상담사례집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치밀 정도다. 대형 학원에 1년 계약직으로 취업한 한 여성은 사장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에 시달리다 이를 거부한 대가로 8개월 만에 해고됐다. 수습기간 3개월을 거쳐야 정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었던 다른 계약직 여성은 입사 첫날 환영회에서 상사로부터 “나랑 자자”는 말까지 들었지만, 불이익이 있을까봐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한국여성민우회에 따르면 직장 내 성추행, 성희롱 사건 중 다수는 여성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또한 고용이 불안정한 신입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은 주로 사내 분위기를 잘 모르는 입사 1~2개월 차에 일어난다.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는 대가로, 혹은 일자리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미지=여성 비정규직의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의 포스터]

최근에도 국내 굴지의 대형 출판사가 정규직 전환을 앞둔 계약직 사원의 최종면담 자리에서 여직원을 성추행한 회사 간부를 복직시켜 논란이 일었다. 성추행을 견디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은 정직원이 된 후 피해 사실을 사내에 알렸지만, 그녀는 내부고발자로 몰려 회사를 그만둬야만 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 사회의 고용불안정이 심화되면 될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여느 투쟁가들의 말처럼 ‘생명과도 같은 일자리’ 앞에서, 자신의 성적 자존감마저 포기해야 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그리고 그런 성(性)을 착취하는 데 아랑곳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잔인무도한가. 오늘도 그런 세상 속에서 무사하길 바랄 뿐인 수많은 우리들을 떠올리며 슬퍼지는 밤이다.

o 글쓴이 : 이고은. 경향신문 기자. 2005년 입사해 정치부, 사회부를 거쳤고, 현재 미디어기획팀(前 인터랙티브팀) 소속이다. 2013년 6월 첫 아이를 출산해 1년간 육아휴직 후 2014년 9월 복직했다.

* 본 글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양평원 블로그에 게재하였습니다.

* 본 글은 양평원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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