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친 여친 달래주기 좋은 '143번' 버스 데이트

2016-02-1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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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여객 차고지에서 압구정 로데오거리까지, 143번 버스데이트 여정이 담겨 있다 / 유튜브

대진여객 차고지에서 압구정 로데오거리까지, 143번 버스데이트 여정이 담겨 있다 / 유튜브, wikitree4you
He said...

얼마 전 여자친구와 대판 싸웠다. 소홀해진 내 모습에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우리 커플은 그저 밥 먹고 영화 보는 식상한 데이트를 주로 해왔다. 그러다 보니 특별해야 할 연애가 평범한 일상이 돼버렸다. 데이트 계획 짜는 걸 귀찮아했던 내 잘못이 컸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걱정이 밀려왔다. 사과의 의미로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시내버스 데이트'였다. 버스를 함께 타고 중간중간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추억을 남길 셀카봉도 준비했다.

'빵점 남친'이 준비한 버스 데이트

서울 시내버스 가운데 대진여객 143번을 '데이트 버스'로 선택했다. 한성대 앞·성신여대 앞·대학로·종로·명동·해방촌 예술마을·압구정 로데오거리·고속터미널·삼성동 코엑스 등 젊은 커플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를 지나가기 때문이다.    

143번 버스에서 찍은 노선도 / 이하 위키트리 

 

반나절 정도 '시내버스 데이트'를 해본 여자친구 반응은 어땠을까. 토라졌던 마음은 누그러졌을까. 나는 33세 회사원, 여자친구는 25세 대학생이다.  

(※이 스토리는 가상 상황이다. 등장하는 두 사람도 실제 커플이 아니다. 나이와 직업도 설정이다. 연기는 난생 처음인 사람들이다. 실제처럼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발 연기'는 이해를 구한다.)

25살 여대생(왼쪽)과 33세 회사원(오른쪽) 커플 설정이다 

 

She said... 

지난 15일 밤 싸운 지 일주일 만에 남자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자기가 준비한 특별 이벤트가 있다고,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며 버스 데이트를 제안했다.

만날 때면 항상 피곤한 표정에 짜증만 내던 남자친구다. 심지어 일주일 전 내 생일엔 나를 '김밥천국'에 데려갔던 사람이다. 물론 김밥천국이 나쁘단 건 아니다. '그래도 내 생일이면 좀 더 근사한 곳에 데려갈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랬던 남자가 오랜만에 연락해 한다는 말이 버스 데이트다. 사귄 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벤트라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남자친구. 계획이나 이벤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조금 걱정되기도, 설레기도 했다. 재밌으려나.

오빠가 제안한 버스는 143번이다. 혜화, 종로 등 데이트 코스를 한 번에 돌 수 있는 버스라고 한다. 나와의 데이트를 위해 직장에서 연차도 썼다고, 꼭 이날 만나야 한다고 했다. 

대진여객 차고지로 날 데려간 남친

우리는 143번 버스회사인 대진여객 차고지에서 만났다. 오빠가 이곳에서 보자고 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었는데 처음 보는 버스 차고지는 신기했다.

막상 만나니 날씨가 맘에 안들었다. 눈은 펑펑 내리고, 춥고... "날씨 좋을 때 하는 게 어떠냐"고 해봤지만, 너무나 의욕에 불탄 표정으로 "오빠만 믿어"라고 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일단 속는 셈치고 버스를 탔다. 

우리는 143번 버스회사인 대진여객 차고지에서 만났다 

"오빠가 알아둔 맛집이 있지~"

우리가 맨 처음 내린 정류장은 '삼선교, 한성대학교'였다. 마침 내리니 점심시간이었다. "우리 뭐 먹을까?"라고 습관처럼 묻는 내게 한 말. "오빠가 알아둔 맛집이 있지. '꿀맛식당'이라고 함박스테이크가 맛있대." 

초행길에, 길치였던 우리는 약간 길을 헤맸다. 눈은 오고 배는 고픈데 가게는 어딘지도 모르겠고. 내가 지도를 보려고 하면 "오빠가 알아서 할게"라면서 내 핸드폰을 뺏어가는 남자…;;; 곧 도착한다는 말과는 달리 가도 가도 가게는 나오지 않았다.

삼선교, 한성대학교' 정거장에서 내린 뒤 '꿀맛식당'으로 향했다. 10여 분 헤매며 고생해 토라진 나(오른쪽)와 그런 여친을 달래주는 남자친구(왼쪽) 

그렇게 길에서 10여 분 헤매다 찾았다. 밖은 춥고 눈 내리고, 길까지 헤매고 (ㅠㅠ) 음식도 맛없었으면 화낼 뻔했는데, 다행히 맛있었다!

360도 VR 이미지 (이미지 클릭 후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 보세요) 

가게에서 나온 후 오빠가 데려간 곳은 식당 앞에 있던 독립서점 '오디너리북샵'.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 직접 출판한 책을 파는 곳이었다. 일반 대형서점과는 달리 아기자기했다. 책 보면서 이야기를 좀 했다. ‘맞다. 오빠랑 서점에서 만났었지.’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식당 앞 독립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밥도 먹고, 책도 보면서 얘기하니 후식 생각이 났다. 마침 근처에 있는 '나폴레옹 빵집'에 갔다. 들어가니 빵 냄새 물씬! 맛있는 빵이 한가득! 짠돌이 남친이 밥에 이어 후식까지 사준다고 했을 땐 좀 감동이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간 곳은 대학로였다. 한성대랑 한 정거장 차이라 걸어갔다. 배도 부르니 소화도 시킬 겸 걷자는 게 이유였다. 대학로 명소 마로니에공원에 갔다. 

갑자기 새우깡을 사는 오빠 

그런데 배부르다면서 새우깡은 왜 사지…? 오빠는 새우깡이 먹고 싶다며 근처 편의점에서 새우깡을 샀다.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눈도 그치고 바람도 덜 불어서 걸을 만했다. 

그런데 저기 비둘기가 보인다. 비둘기들 쪽으로 가길래 설마 했는데 과자를 주고 있다. 비둘기가 과자 받아먹는다고 점프까지 했다. 심지어 나보고도 해보란다. 나 비둘기 싫어하는데, 순간 너무 짜증 나서 남친 얼굴에 새우깡을 던졌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남자친구가 비둘기에게 새우깡을 주고 있다. 나는 비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연신 나를 붙잡으며 "장난이었다"며 "여기까지 온 김에 근처 미술관도 들렀다 가자. 너 전시회 같은 거 좋아하잖아. 화 풀어"라고 한다. 

이 오빠가 그럼 그렇지. 반쯤 포기한 상태로 근처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에 갔다. 기대를 버려서 그런가. 오랜만에 하는 미술관 데이트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도 비둘기한테 새우깡 주는 건 너무 심했다고 (ㅠㅠ)

내가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오빠는 내게 "다음 코스는 진짜 재미있을 거야. 기대해"라고 말했다. "어디 가는데?"라고 물어봐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비밀이야"라고 말하며 버스정류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다음에 내린 곳은 서울 용산구 '해방촌' 정류장이었다. 조금 걸으니 골목 사이사이 개성 넘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예쁜 카페도 많았다. 벽화 앞에서 사진도 찍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많이 추웠는데 몸이 조금 누그러졌다.

용산구 해방촌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압구정 동물인형 가게에서 '추억팔이'

마지막으로 우리가 간 곳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였다. 기분 전환시켜준다면서 데려온 곳은 인형가게 '한사토이'였다. "너 동물 되게 좋아하잖아. 우리 처음에 동물원도 자주 가고 그랬었는데"라면서 자꾸 추억팔이하는 오빠!!! 흠, 장난으로 제일 큰 말 인형 사달라고 했는데 진짜 사준단다. (농담이야…)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있는 동물 인형가게를 찾았다 

어휴… 병 주고 약 주는 우리 오빠. 나 아니면 누가 데리고 살까 싶다. 내가 봐줘야지(한숨)...

우리의 버스 데이트는 여기서 끝났다. 둘 다 저질체력인데다 버스 차고지에서 한성대, 대학로, 해방촌, 압구정 로데오거리까지 돌다 보니 너무 지쳐버렸다! 게다가 오빠는 회사원이니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하고, 그래서 빨리 헤어지기로 했다. 

데이트는 어땠냐고? 생각보다 재밌었다. 중간중간 "너 이거 좋아하잖아"라며 은근하게 챙겨주고, "우리 그때 그랬는데"라며 곳곳에서 옛 추억을 회상하게 해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애로사항도 여럿 있긴 했지만, '워커홀릭' 직장인이 내 기분 하나 풀어준다고 종일 애쓴 것도 감동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버스데이트를 하고 싶다! 물론 그때는 오빠와 나, 둘이서 짤 생각이다. 아니면 아예 무계획적으로, 즉흥적으로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비즈비트 이인혜·강혜민·손기영 기자가 공동 기획·취재했습니다.

*사진·영상= 전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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