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흔적을 찾아 떠난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2기 탐방단

2016-04-2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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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흔적을 찾아 떠난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지난 4월 23일, 토요일 전국에 미세먼지 주위보가 발행되었으나, 우리 궁궐문화의 가치를 찾기 위한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2기 탐방단의 경희궁 탐방이 진행되었다. 이하 사진 / 문화유산국민신탁 촬영]

경희궁은 살아있다.

400여 년전에 '경덕궁'이라고 불리던 '경희궁'은 창덕궁만큼이나 중요한 궁궐이었으나, 경복궁의 중건으로 경희궁의 전각들은 헐러나갔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가 들어서면서 경희궁의 존재는 우리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몇개의 전각만이 살아남아 지금 경희궁 터에 일부 복원되면서 다시 우리 역사 속에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4월 23일 토요일,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2기 탐방단 단원들이 4회차 궁궐 탐방으로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궁, 경희궁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도성의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종묘의 복구가 제일 먼저 시행되었고, 연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에 기거하기를 극도로 꺼리고 1616년 새로운 궁궐 짓기에 몰두하여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경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새문동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있으니 새 궁궐을 짓자는 술사의 말에 따라 광해군은 경덕궁 건설을 단행하여 1620년 우리 역사 속에 경덕궁이 탄생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독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잠저였으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인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불탄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기 위해 재목을 헐어다 사용하게 되고 궁궐 모습과 위상은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90년 복원되기 이전의 경희궁 숭정전(위) 현재 복원이 완료된 경희궁 숭전전(아래) / 사진 문화재청 제공]

경희궁의 변화

고종 대 경복궁의 중건사업은 조선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위지의 표현이었으나, 경희궁에게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궁전의 건축 자재로 활용하면서 경희궁은 폐허의 궁으로 전락하였다.

대한제국기의 경휘궁은 궁 본래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고 일부 전각만 겨우 존속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료 자제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아예 궁의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미세먼지 주위보로 경희궁 탐방에 마스크를 착용한 체 참여한 많은 탐방단원은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과 활동가의 안내해설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하는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2기 탐방단

저학년 2개반과 고학년 4개반 총 120명의 청소년 궁궐문화아카데미 탐방단원들은 지난 3월부터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 창경궁 그리고 경희궁 등 조선왕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조선 궁궐들을 차례로 탐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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