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현금들고 오라"… 각자내기 신풍속도

2016-10-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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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연합뉴스 (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내일 모임 오후 7시 OO식당, 더치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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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내일 모임 오후 7시 OO식당, 더치페이 3만원씩 현금 지참하세요'

충북도청에 근무하는 A(52)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업체 직원, 기자 등 5명에게 모임을 공지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들은 10여년 전부터 업무와 관계없이 2∼3개월에 한 번씩 부정기적인 모임을 하고 있다. 그동안 식사비는 특별한 기준이 없이 "이번엔 내가 낼게, 다음엔 네가 내라"는 식으로 계산해왔다.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더치페이(각자 내기)는 당연하지만, A씨가 현금지참까지 통보한 것은 최근 경험한 유쾌하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며칠 전 동료 직원들과 점심을 먹은 뒤 'n분의 1'을 해 1인당 8천원씩 내기로 했다. 현금이 없어 신용카드로 결제하기로 했으나 마침 식사비를 계산하려는 사람들이 몰렸다. 어쩔 수 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몇 분 동안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A씨는 "1만원도 되지 않는 점심값을 내기 위해 후배들과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니 체면이 서지 않았는데, 주인이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현금 없어요?'라고 물어서 낯이 뜨거웠다"고 경험을 얘기했다.

A씨는 "그 일을 겪은 뒤 지갑에 10만원 내외의 현금을 넣고 다니며, 내가 부담해야 할 음식값은 현금으로 다른 참석자에게 미리 준다"며 "아직은 카드 더치페이가 영 불편하다"고 덧붙였다.

공무원 B(48)씨도 비슷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B씨는 "얼마 전 친구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먹은 뒤 10만원 갓 넘는 돈을 6명으로 나눠 카드 결제를 하려다 보니 왠지 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며 "앞으로는 모임 때 현금을 갹출해서 결제할 생각"이라고 속마음을 전했다.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젊은 층에서는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식사나 술을 마신 뒤 각자 먹은 만큼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情)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에 익숙한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더치페이가 아직은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후배들과 식사를 하면 선배가 '계산'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호기롭게 '내가 쏠게'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해왔다.

특히 '갑'이 '을'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인 '접대문화'에 익숙한 장년층들에게 김영란법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더치페이 시대'를 맞아 새로운 풍속도로 등장한 '현금 갹출' 결제도 이런 움직임 가운데 하나다.

음식점 입장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각자내기가 일반화되면서 한 테이블의 식사비를 여러 장의 카드로 결제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금 결제를 하면 카드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데다 수입원도 노출되지 않는 장점까지 있어 주인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부 식당은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현금 결제하는 손님에게 할인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하기도 했다.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의 한 식당은 최근 1인당 1만원짜리 '보쌈 정식'을 개발했다. 현금으로 결제하면 7천원으로 할인해주기로 하고 홍보 플래카드까지 내걸었다.

청주시 용암동의 한 한정식 음식점도 현금으로 결제하면 10%를 할인해주고 있다.

청주시청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송모씨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손님들이 더치페이하면서 카드 영수증이 예상보다 빨리 소진됐다"며 "더치페이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씨는 "며칠 전부터 참석자들끼리 현금을 걷어서 음식값을 내는 풍경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현재 90%를 웃도는 카드 결제율이 낮아진다면 식당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현금 결제가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실제는 한 사람이 결제를 한 뒤 현금을 갹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김영란법을 피해 가는 편법의 하나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접대를 받은 뒤 현금으로 'n분의 1'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특히 현금으로 각자 내기를 했어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입증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충북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가장 확실하게 나눠내기를 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각자 신용카드 등으로 결제하는 것"이라며 "현금을 결제하더라도 영수증을 나눠서 발급받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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