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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마르셀 뒤샹·르 코르뷔지에...' 고정관념을 깬 예술가 7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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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다른 발상으로 고정관념에 맞선 예술가를 모아봤다. 


    1. 바실리 칸딘스키(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8' (1923) / 이하 위키미디어
     
    바실리 칸딘스키 '원 속의 원' (1923)
     

    칸딘스키는 20세기 추상미술 선구자로 불린다. 추상미술은 대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내는 게 아닌 점, 선, 면, 색과 같은 추상적 요소로 표현하는 흐름을 말한다. 

    예전에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충실하고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작가가 많았다. 칸딘스키는 회화 본질은 인간 내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1883)를 특히 좋아했다. 바그너 오페라를 듣고 감명을 받은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고, 음악도 다시 그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2. 아널드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

    유튜브, musicophage rex

    위키미디어
     

    쇤베르크 이전까지 서양음악 토대는 조성 음악이었다. 조성 음악은 중심이 되는 음(으뜸음)과 화음을 위주로 흘러가는 음악을 말한다. 이는 서양음악에서 보편적인 작곡 원리로 인식됐다. 쇤베르크는 조성 음악에 의문을 제기했다.  

    쇤베르크는 조성이 파괴돼 예측하기 어려운 무조음악을 추구했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그가 남긴 무조음악은 수많은 현대 음악가에게 귀감이 됐다.

     
    3.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1877~1927)

    이사도라 덩컨 / 위키미디어
     

    덩컨은 '자유 무용'을 주창했다. 그는 우아하지만 제약이 많은 기성 발레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자 했다.

    1899년 그는 시카고 무대에서 발레화와 타이츠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반나체로 발레를 시도했다. 당시 관객은 기교나 속박을 벗어던진 덩컨 무대를 보며 조소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파리에서 무대를 다시 선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관객 지지를 얻은 그는 유럽 각 도시를 돌며 '자유 무용'을 소개했다. 

    덩컨은 공연 도중 나체에 가깝게 의상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공산주의자, 매춘부'라 비난했다. 덩컨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왜 내가 내 몸이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나요? 이건 여성 자유에 대한 상징입니다. 또한, 청교도적 속박과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죠. 외설은 인간 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숨기는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 성전입니다"

     



    덩컨은 무용수 영혼이 충분한 영감을 받으면 동작은 저절로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는 춤을 출 때 기교나 형식이 아닌 자유로운 내면을 중요시했다. 물론 그는 기존 무용 전통을 모조리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전 발레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히 취했다. 그는 사고가 유연했다.

    위키피디아
     

    1904년 10월, 덩컨은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학생들이 무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도록 도왔다. 

    1905년 1월, 덩컨은 러시아에서 역사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러시아 노동자 수만 명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빈부 격차에 분노하며 정부에 불만을 제기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했다. 

    이는 덩컨 인생에 크나큰 전환점이 됐다. 덩컨은 본격적으로 춤에 사회 비판을 담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어려움을 호소하며 자식 먹일 빵을 요구하러 겨울 궁전에 왔다가 학살당한 노동자들을 봤다. 나는 이 슬픈 행렬을 보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 생애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4.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1883~1971)

    유튜브, CHANEL


    샤넬은 전통적인 여성 의복에 의문을 품었다. 그가 보기에 기성 의복은 불편하고 비실용적이었다. 그는 답답하고 장식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샤넬이 만든 옷 덕분에 많은 여성은 답답하게 몸을 조이던 코르셋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샤넬은 한때 비난에 시달렸다. 비실용적이긴 해도 화려하고 장식 많은 옷에 익숙하던 당대 사람에게 샤넬이 만든 옷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샤넬은 굴복하지 않았다.

    샤넬은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내 옷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성공 원천이 됐다. 나는 누구와도 같지 않다"

     



    5.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

    르 코르뷔지에 / 코바나 컨텐츠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르 코르뷔지에가 활동하던 시절, 기성 건축가들은 권위적이고 화려한 건물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장식적인 요소를 지양했다. 그는 '인간 생활'에 집중한 합리적인 건축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건축이 권위와 지배를 위한 공간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다. 보수적인 건축가들은 이런 시각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가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모듈러 이론을 창안했다. 모듈러는 1.83미터 신장을 가진 성인 남성 신체를 기준으로 그가 팔을 들어 올린 높이를 건축 핵심으로 잡는 이론이다. 당시 많은 사람은 르 코르뷔지에 '모듈러' 연구에 대해 '미친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생소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르 코르뷔지에 편을 들어준 사람이 있었다. 유명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이었다.


    "어떤 사람은 당신 모듈러가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꿀 만한 연구라고 봅니다. 당신 성과는 위대한 과학자에 버금간다고 생각합니다."


    - 아인슈타인이 르 코르뷔지에에게 보낸 편지




    그는 '현대건축 5원칙'도 창안했다. 


    - 필로티 : 건물 1층을 비워두는 방식이다. 1층은 휴식처나 주차 공간으로 사용된다. 


    - 자유로운 파사드(입면) : 건물 입면을 회화 화면처럼 자유롭께 꾸미는 방식이다. 르 코르뷔지에 이전까지만 해도 기둥이 건물 전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기둥을 파사드 뒤로 숨겼다. 


    - 자유로운 평면 : 르 코르뷔지에는 벽을 '개방적이고 가변적인' 칸막이로 바꿨다. 따라서 '현대건축 5원칙'이 적용된 건물에서는 공간을 더욱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 가로로 긴 창 : 르 코르뷔지에는 가로로 긴 창을 구현했다. 이런 창은 수직 창보다 자연광을 더 많이 흡수한다. 또 거주자는 파노라마와 같은 전경을 즐길 수 있다. 


    - 옥상정원 : 옥상은 휴식 장소로 활용된다.




    '사보아 주택'은 '현대건축 5원칙'을 적용한 건물이다.


    르 코르뷔지에 '사보아 주택' (1928) / 이하 르 코르뷔지에 재단
     

    그는 사보아 주택 외에도 유니테 다비타시옹, 페삭 주거 단지, 라 투레트 수도원 등 유명 건축을 남겼다. 지난해 7월 유네스코는 그가 남긴 건축 17점을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르 코르뷔지에 '롱샹 성당(노트르담 뒤 오)' (1955)
     
    르 코르뷔지에 '유니테 다비타시옹' (1952)
     
    르 코르뷔지에 '라 투레트 수도원' (1953)
     
    르 코르뷔지에 '페삭 주거 단지' (1924)
     

    6.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1887~1968)

    위키피디아
     

    1917년, 뒤샹은 한 공모전에 공산품으로 나온 남성용 소변기를 출품하고 'R. Mutt'라는 가명으로 사인했다. 그는 작품에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혹평했다. 사람들은 이미 제작된 물건이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모전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 flickr
     

    이 사건은 현대미술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사람들은 뒤샹이 출품한 '샘'을 보며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이라는 뜻이다. 뒤샹은 일상 속에 이미 존재하던 물건이라도 '사인을 하고, 미술품으로 바라보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뒤샹이 한 시도는 기존 미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화나 조각을 통해 사물이나 사건, 인간 감정을 재현하는 것만이 미술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7.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

    위키미디어
     

    브레히트 이전까지, 서구 극작가들은 '감정 이입'을 중시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384~BC322)가 집필한 '시학'을 토대로 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관객은 무대 위 배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브레히트는 전통적인 연극 관습에 의문을 제기했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예술을 통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브레히트가 보기에 전통적인 연극은 관객을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인 존재로 머물게 했다. 그는 관객이 무대 위 인물과 거리를 두고 그가 하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길 바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객 '몰입'을 깨뜨려야 했다. 

    그는 '낯설게 하기(생소화 효과, 소격 효과)'를 주창했다. '낯설게 하기'란 관객을 낯설게 만드는 여러 장치를 통해 몰입을 깨는 것이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 지금 이 상황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알리는 게 있다. 관객이 인물 중 누군가에게 감정을 한창 몰입하려고 할 때쯤 배우 중 한 사람이 나와 "이건 연극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브레히트는 이런 장치를 활용하면 관객이 무대 위 사건을 객관적인 시선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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