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것” 뮤지컬 배우 남경주가 말하는 자코메티

2017-12-2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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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주 씨는 오는 21일부터 열리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에 오디오가이드로 참여했다.

MBC '복면가왕'
MBC '복면가왕'

"저도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공감되는 말이 많았다"

국내 '뮤지컬계 대부'로 불리는 남경주(53) 씨가 소탈하게 말했다. 니트 비니를 덮어 쓰고 추운 날씨를 혼자 뚫고 온 그에게선 꾸밈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남경주 씨는 1982년 '보이 체크'로 데뷔한 후 내로라하는 작품 대부분에 참여한 대표적인 국내 뮤지컬 1세대 배우다. 지난해 11월 MBC 예능 '복면가왕'에 '시험지' 가면을 쓰고 출연해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시청자들을 홀렸다.

선명하고 안정감 있는 남경주 씨 목소리를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에서 들을 수 있다.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오는 21일부터 내년 4월 15일까지 열린다.

남경주 씨는 이번 자코메티 전시에 오디오가이드로 참여했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할 전망이다.

지난 1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작품 해설을 녹음하는 남경주 씨를 만났다.

이하 전성규 기자
이하 전성규 기자

남경주 씨는 "위대한 예술가의 생각을 내가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라고 오디오가이드 참여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같은 예술 분야에 있는 배우로서 어떤 말들은 깊이 공감됐다. 그런 건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것을 다 걷어내고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싶다"

남경주 씨는 자코메티가 한 말 가운데서도 특히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채워가는 게 아니라 걷어가는 일이다"라는 구절에 많이 공감했다고 밝혔다.

"저도 지금 연기하면서, 맡은 인물과 주어진 상황에 아주 적당하게 맞는 진심을 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예술가들이 처음에 사실적인 작품에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최소한만, 본질적이고 순수한 것만 남겨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이나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추상화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불필요한 것을 다 걷어내고 봤더니 그게 아주 본질적인 것만 남은 거라고. 저 역시 배우로서 그런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걷어낼 수 있을까."

남경주 씨는 자코메티가 '눈빛'에 집착했던 것도 인상적인 부분으로 꼽았다. 남경주 씨는 "연기를 잘하려면 내가 할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나한테 하는 얘기를 진실로 보고 들어야 한다. 감정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뭔가에 의해서 나오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조각가 김영원 선생님의 애제자였다"

남경주 씨는 고등학교 시절 조소를 배웠던 경험이 있다. 남경주 씨는 "사실 조각가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미술부 선배들이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너무 아티스트 같고 멋있어 보였다. 저 작업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술부에 들어갔다. 회화 전공하는 곳은 작업복을 안 입었고 조소하는 작업실 가니까 선배들이 입고 있더라. 군복을 물들여서 만든 건데 물감도 묻어 있고 진흙도 묻어 있는 게 너무 멋있었다"고 회상했다.

조각가 김영원(70) 씨가 당시 조소를 담당했던 교사였다. 김영원 씨는 남경주 씨를 눈여겨 보며 손재주가 좋다는 칭찬을 자주 했다. 처음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남경주 씨에게 작품 마무리 작업을 맡겼을 정도로 신뢰했다. 남경주 씨는 "제가 김영원 선생님 애제자였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하지만 남경주 씨는 결국 뮤지컬 배우가 됐다. 형이자 배우인 남경읍(59) 씨 영향이 컸다. 남경주 씨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형님 공연도 많이 보러다니고 그런 환경에 노출돼 자랐다"며 "이게 더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남경주 씨 미래는 조소 스승이었던 김영원 씨도 예상했다. 남경주 씨는 "선생님이 '경주 쟤는 조소를 하긴 하지만 나중에 꼭 배우 생활을 할 거야'라고 하셨다. 맨날 작업하면서도 노래 부르고 춤 추고 기타 뚱땅거리고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만약 조각을 계속 했더라면 어땠을까. 남경주 씨는 "아직도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담배를 지근지근 씹어가며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깡마른 워킹맨을 보고 농부를 떠올렸다. 인간 본연의 모습 아닌가"

남경주 씨가 오디오가이드로 참여한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역대 처음으로 열리는 자코메티 전시회다. 특히 자코메티 파리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 석고 원본이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다.

주관사 코바나컨텐츠 측은 "북한 핵실험과 최근에 발생한 지진 때문에 '걸어가는 사람'이 하마터면 한국에 못 들어올 뻔 했다. 자코메티 재단에서 마지막까지 망설였다"고 전했다.

남경주 씨가 본 '걸어가는 사람'은 어떨까. 남경주 씨는 "깡마른 '워킹맨(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농부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남경주 씨는 "저는 농부를 가장 존경한다. 왜냐하면 농부는 오늘 일을 다음날로 미루지 않고, 늘 자연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매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한다. 그게 인간 본연의 모습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배우는 그런 사람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부의 생활 방식이나 루틴(일상)을 닮을 수 있다면 충분히 훌륭한 배우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욕심 안 부리고, 계속 '걸어가는' 거다. 농부도 워킹맨이고, 저 역시 그렇다."

home 박혜연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