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한쪽이 그냥 쑥” 위험 도사리는 서울 지하철 승강장

2018-02-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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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던 승객 서너 명이 내 양팔과 외투에 달린 모자를 잡고 끌어 올렸다.

필자는 지난해 지하철 승강장 틈에 발이 쏙 빠지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했던 적이 있다.

작년 11월 오후 6시 30분쯤, 난 퇴근 인파로 붐비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 승강장 앞에 서 있었다. 전동차 문이 열렸지만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동차 출입문 바로 앞까지 승객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 차는 그냥 보내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뒤쪽에서 전동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내 등을 떠밀었다. 왼쪽 다리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 틈에 쑥 빠졌다. 약 10cm 정도 되는 틈이었다.

전동차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왼쪽 다리가 철로 바닥에 닿지 않아 힘이 달렸다. 주변에 있던 승객 서너 명이 내 양팔과 외투에 달린 모자를 잡고 끌어 올렸다.

필자를 건져 올린 50대 남성은 "어휴, 저 틈이 왜 저렇게 넓어. 위험하게"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인 다리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커먼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열차가 그냥 출발했다면...'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집에 돌아가는 내내 왼쪽 허벅지는 피가 나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왼쪽 허벅지와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 부어올랐다.

이날 이후 지하철에 오를 때 보폭을 넓게 벌리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이 많으면 몇 대가 됐건 타지 않고 그냥 보냈다.

'발빠짐 주의!' 안내문이 붙어있는 3호선 종로3가역 / 이하 위키트리
'발빠짐 주의!' 안내문이 붙어있는 3호선 종로3가역 / 이하 위키트리

지난달 24일 오후 발빠짐 사고를 당했던 종로 3가역을 다시 찾았다. '틈'은 여전했다.

한 여성은 두어번 시도만에 전동차에서 내렸다. 여성은 승강장 사이 틈을 확인하고 유모차 앞 바퀴를 번쩍 들어 승강장 쪽으로 밀었다.

유모차가 그냥 빠져나오기에는 넓은 전동차-승강장 사이 틈
유모차가 그냥 빠져나오기에는 넓은 전동차-승강장 사이 틈

임지연(여·34) 씨는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 틈에 바퀴가 걸릴 때가 종종 있다"며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항상 조심한다. 사람이 많을 땐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탈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다음 열차가 도착했다. 함께 3호선 열차에 오른 이준명(남·22) 씨는 "지하철에 급하게 타다가 틈 사이로 물건을 떨어트린 적이 있었다. 내 잘못이긴 하지만, 안전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종로 3가역을 시작으로 서울 주요 환승역인 을지로 3가역과 시청역까지 총 3곳을 돌아봤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 틈은 약 10㎝로 대부분 비슷했다. 신발이나 발이 빠지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시청역 2호선을 이용 중인 시민들. 고무 발판이 설치돼 있지만 여전히 발이 빠질 만큼 틈은 있었다.
시청역 2호선을 이용 중인 시민들. 고무 발판이 설치돼 있지만 여전히 발이 빠질 만큼 틈은 있었다.

지난해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 1~9호선 역사 중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10㎝를 초과한 역사는 111개 역으로 확인됐다. 전체 역사 307개 중 36%에 달하는 수치다.

2호선 신당역 승강장 틈에 신발을 빠트린 경험이 있다는 직장인 박모(여·32) 씨는 "역사에 전화를 했더니 '그런 사례가 많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신발을 찾아주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 서울 지하철역 관계자는 "역사 자체적으로는 하루에 9번 정도 순찰을 돌고 있다. 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안전발판 설치를 늘려가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도시철도건설규칙 제30조에 따르면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10㎝가 넘을 경우, '고무발판'이나 '자동 안전발판'같은 발빠짐 사고 방지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돌아본 3개 역 중 이런 안전발판은 일부 출입문에만 설치돼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몰리는 인파로 혼잡한 서울 지하철
출퇴근 시간이면 몰리는 인파로 혼잡한 서울 지하철

서울 지하철역 발빠짐 사고에 대한 우려는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지하철 승강장 발빠짐 사고는 총 351건이 발생했다. 닷새에 한 번꼴로 사고가 일어난 셈이다.

지난 2015년에는 53건, 2016년에는 79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상반기에만 39건이 발생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지하철 건설시 땅속 구조, 이동 경로 등 다양한 변수들 때문에 원하는 방향대로 뚫을 수가 없다"며 "최적의 경로로 뚫긴 하지만, 승강장과 전동차 간 간격까지 다 감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안전발판 설치 미비에 대해서는 "예산이나 안전성 확인 등 여러 요소 때문에 한 번에 다 설치하기는 어렵다. 순차적으로 안전발판 설치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역에 설치된 고정식 고무발판
서울 지하철역에 설치된 고정식 고무발판

서울교통공사 측은 곡선 구간이 많아 고정식 고무발판을 설치할 수 없는 승강장에는 '자동 안전발판'을 설치하고 있다. 자동 안전발판은 전동차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올라가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를 메워주는 장치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올해 김포공항역 등 6개 역에 설치를 완료할 예정"이라며 "안전 모니터링을 진행해 그 결과에 따라 사업확대 여부를 조정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접이식 자동 안전발판 / 서울시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접이식 자동 안전발판 / 서울시

국가안전관리대학원 허억 교수는 "서울 지하철 중 유독 사이 간격이 넓은 곳들이 있다. 어른들도 빠지기 쉽기 때문에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 크게 다칠 위험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허억 교수는 "지하철역 설계 단계부터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 간격을 최소화하고, 사고 위험성이 있는 출입문에는 한시라도 빨리 안전 발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