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 집·학원으로”... '저녁 꼰대' 줄어드니 광화문 식당가도 썰렁

2018-02-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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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음식점들이 손님 감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광화문 상권'이라는 말은 옛말이 돼 가고 있다.

지난달 22일 음식점이 밀집한 서울 광화문 골목 풍경.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 이하 손기영 기자
지난달 22일 음식점이 밀집한 서울 광화문 골목 풍경.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 이하 손기영 기자

"날마다 공쳐요. 손님이 없다고요. 1월 말에 문 닫습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일식집 직원 성모(50) 씨는 체념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식당에는 성 씨 말고 아무도 없었다. 식당 주인은 그에게 가게를 맡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이 식당은 25년 역사를 자랑한다. 식당 한쪽 벽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정치인, 연예인 사인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이름만 얘기도 알만한 유명인들이었다.

성 씨는 텅빈 식당에 앉아 버섯을 손질하고 있었다. 손놀림도 분주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는 저녁 시간만 되면 정신없이 바빴지만, 약 1년 전부터 손님이 크게 줄어 지금은 재료 손질도 할 정도로 한가하다고 했다.

성 씨는 "월급도 한 달 넘게 못 받았다. 사장도 미안해 한다"며 "요즘 광화문 주변 관공서나 회사 사람들이 잘 안 온다. 이상하게 저녁에 사람들이 잘 만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사이 일식집 사장 A씨가 가게로 후다닥 들어오더니 "다 안 된다. 너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점점 나빠졌다. 그러니 가게 문을 닫을 수 밖에..."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광화문 식당가, 직원 줄이고 폐업하는 곳도 생겨

광화문에 있는 한 향토음식점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점 사장 김모(62) 씨는 장사가 잘 될 때는 저녁 시간에 전체 45석 가운데 예약 손님만으로 40석이 찰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초부터 손님이 점차 줄어들어, 요즘은 예약 손님과 예약 없이 오는 손님 통틀어 저녁에 10~12석 정도 자리가 찬다고 말했다.

김 씨는 가게 사정이 어려워지자 최근 직원 수를 3명에서 2명으로 줄였다. 직원 2명은 반나절만 근무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직원 3명 모두 영업 시간 내내 일했었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사장 김 씨와 남편 강모(67) 씨도 주방 일과 서빙 등을 직원과 함께 하고 있다. 김 씨는 "우리 가게는 남편하고 내가 나이가 있어서 직원을 더 줄이고 싶어도 어렵다"며 "요즘 가게 사정이 어려워 직원을 두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일하는 음식점도 많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 가게는 옛날하고 똑같은 맛을 내고 있다. 음식점이라는 게 맛있으면 항상 오시는 분들이 있기 마련"이라며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가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음식점 대부분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저녁 시간에 텅텅 비는 음식점도 적지 않다"고 했다.

김 씨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사람들 간의 만남, 접대 이런 게 줄어든 것 같다"며 "예전에는 저녁 시간만 되면 예약 손님들로 꽉 찼다. 그러나 지금은 직장 모임이나 사업적인 일로 만나거나, 친구들끼리 만나거나 그런 게 많이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광화문 음식장 사장은 '사람들 간의 만남, 접대 이런 게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광화문 음식장 사장은 "사람들 간의 만남, 접대 이런 게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관공서, 기업, 언론사 등이 밀집한 광화문은 주변 음식점에 '직장인 손님'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대표적인 상권이었다. 예약 없이는 가지 못하는 음식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광화문 일대 상당수 음식점들이 손님 감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광화문 상권'이라는 말은 옛말이 돼 가고 있다.

지난달 16일부터 일주일 가량 광화문 일대 주요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실태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음식점 관계자 입에서 "손님이 크게 줄었다"는 말이 나왔다. 예전에 비해 가게 사정이 나빠져 직원 수를 줄이거나 심지어 폐업을 앞둔 곳도 있었다. '남는 게 별로 없다"며 음식 가격을 올리고 싶어도 손님이 더 줄어들까봐 노심초사하는 음식점도 있었다.

◈ 음식점업 매출, 2000년 이후 가장 크게 감소

어려운 음식점들 사정은 통계 지표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통계청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음식점·주점업 생산지수'는 전년 대비 3.0%가 떨어졌다. 통계청이 관련 통계를 조사하기 시작한 지난 2000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지난 2016년 음식점·주점업 생산지수도 전년 대비 0.8%가 하락했다.

통계청은 각 산업 분야별 매출액을 토대로 '서비스업 생산지수'를 발표한다. 서비스업 생산지수에는 세부 조사항목으로 음식점·주점업 생산지수가 포함돼 있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퇴근 이후 자기개발이나 가족과 함께 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퇴근 이후 자기개발이나 가족과 함께 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 회사 퇴근하면 집으로, 학원으로

최근 광화문 음식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광화문에서 만난 음식점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요인은 '줄어든 저녁 만남'이었다. 퇴근 시간 직후 광화문 일대 음식점·술집보다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에서 직장인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광화문에서 만난 회사원 손모(42) 씨는 "요즘 회사에서 저녁 때는 집이나 학원에 가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거의 가족이나 자기개발이다. 끝나면 대부분 개인 시간을 즐긴다"고 말했다.

손 씨는 "20~30대 젊은 직원들에게 불쑥 '저녁 같이 먹자'고 하면 안 좋아한다. 그런 행동을 하면 '꼰대'로 여긴다"며 "회사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려면 최소 1주일 전에는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한다. 퇴근할 무렵 갑자기 저녁 먹자고 하는 직장 상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손 씨는 퇴근 이후 회사 사람들을 붙잡고 밥이나 술을 먹자고 하는 일명 "저녁 꼰대"가 되기 싫다고 했다. 그는 회사를 나와 학원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회사원 박모(38) 씨도 "저녁에 누굴 만나서 술이나 밥을 먹는 일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며 "다들 바쁘고 그러니까. 가족들하고 보내고..."라고 했다.

서용희 한국외식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소비자 트렌드 변화가 외식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녁 시간에 개인의 삶이나 자기개발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정착되고 있다"며 "설령 직장 사람들이나 지인과 저녁에 식사, 술을 하더라도 보통 간단하게 끝낸다. 2~3차 자리까지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 연구원은 "'저녁 장사'는 외식업 매출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보통 '점심 장사'는 음식 위주로 팔리지만, 저녁에는 음식과 술이 함께 팔린다. 손님을 받는 시간도 1~2시간 정도인 점심 시간보다는 저녁 시간이 훨씬 길다"며 "저녁 시간대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가 외식업 매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 세종시 이전, 서촌 상권 부상도 영향 미쳐

이런 가운데 줄어든 저녁 만남뿐만 아니라 '광화문 특수성'을 언급한 음식점 관계자도 있었다. 광화문에 있는 외국음식점 사장 김모(61) 씨는 광화문 관공서 세종시 이전, 광화문 부근 서촌마을 상권 부상,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 정착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김 씨는 "옛날에는 공무원들 덕분에 광화문 상권이 좋았다"며 "정부서울청사 내 몇몇 공공기관들이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가게 매출도 하향곡선을 그렸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금은 (광화문 근처에 있는) 서촌 상권도 많이 개발됐다. 유명 프랜차이즈, 술집이 즐비하다"며 "예전에 정부서울청사에서 서촌으로 가려면 지하보도로 가야했는데, 지금은 횡단보도가 생겼다. 공무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그쪽으로 다 가버린다"고 했다.

김 씨는 "보통 2월에 공무원 인사이동 있다. 예전에는 이때 가는 사람, 오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빈번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김영란법이 정착돼서 그런지 이런 게 많이 없어졌다. 공무원들이 그런 자리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씨는 장사가 잘 됐을 때는 저녁 시간에 30명 정도 손님이 찾아왔지만 요즘은 10명 정도로 뚝 떨어졌다고 했다.

광화문 일대 식당가 점심 시간은 저녁 시간보다 사정이 나았다. 저녁과 달리 '썰렁한' 음식점은 많지 않았다
광화문 일대 식당가 점심 시간은 저녁 시간보다 사정이 나았다. 저녁과 달리 '썰렁한' 음식점은 많지 않았다

◈ 최저임금 부담에 음식값 올린 곳도 있어

점심 시간은 저녁 시간에 비해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광화문 주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나와 인근 음식점으로 향했다. 저녁과 달리 '썰렁한' 음식점은 많지 않았다.

1960년대에 문을 연 광화문 한 해장국집은 점심 시간에 줄을 서야 할 만큼 손님들로 붐볐다. '잘 나가는 맛집'인 이곳은 요즘 최저임금 문제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시간당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인상됐다. 지난해 최저임금 6470원보다 16.4%가 오른 금액이다. 인상률은 16.6%를 기록한 2000년 9월~2001년 8월 이후 가장 높았다.

이 해장국집은 20명 가까운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음식점 사장 B씨는 인건비 문제를 고민하다가 지난달 1일 한동안 유지했던 음식값을 올렸다. 한 손님이 "갑자기 음식값을 왜 올렸냐?"고 묻자 그는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사장 B씨는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이 모두 18명이다. 오전과 오후 각각 나눠서 일하고 있다"며 "해장국은 서민 음식이어서 비싸면 안되는데, 이번에 최저임금이 많이 올라가서 어쩔 수 없었다. 한 5년 동안 유지했던 해장국 값을 7000원에서 7500원으로 올렸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식재료 가격 등 물가 상승, 임대료 인상을 가게 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은 음식점 사장도 있었다.

광화문 식당가는 신음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만난 한 음식점 사장은 "혹시 '내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줄어든 손님은 비단 광화문 식당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 대표 상권 광화문 음식점 위기는 '대한민국 식당 사람들'의 어두운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home 손기영 기자 sk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