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자코메티전 관람기

2018-04-0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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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이 함께 본 자코메티 조각의 세계

이하 위키트리
이하 위키트리

어린 시절 우리집 한쪽 벽에는 엄마가 전국 각지를 떠돌며 모은 수석들이 가득했다.

젊어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고 약간의 방랑벽(?)도 있었던 엄마는 주말이 되면 차를 끌고 강가로 길을 떠났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엄마를 따라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고되고 지루했다. 매번 모아 오는 수석들이 그렇게 멋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이른 봄날, 수석을 주우러 함께 돌아다니던 엄마와 딸은 예술의 전당 앞에서 만났다.

40년대에 출생한 엄마에게 ‘알베르토 자코메티’라는 조각가는 낯선 이름이었다.

피카소에 비견될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는 딸의 설명에 엄마는 특유의 꼼꼼함으로 팜플렛과 입구의 안내문을 읽으며 자코메티라는 인물에 대해 탐색하기 시작했다.

자코메티 파리 재단 제공
자코메티 파리 재단 제공

곧 어린 시절의 그가 그렸다는 가족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심플하지만 개성이 살아 있는 그의 스케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1901년 스위스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했고, 14살 나이에 첫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고대 건축물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청년 자코메티는, 함께 베네치아를 여행한 어느 노신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일면식도 없는 젊은이에게 선뜻 여행을 제안할 만큼 부유하고 여유에 넘치던 이 네덜란드 남성은 베네치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병으로 숨을 거둔다.

자코메티는 “죽어가던 그의 코가 갑작스럽게 길어 보였다”고 회고했고 허망한 죽음의 목격은 이 젊은 조각가의 예술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미술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의 1947년작 ‘걷는 남자’를 보면 “아, 그 조각?”하며 알아볼 것이다.

작은 머리에 긴 팔다리,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면서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조각상은 인간의 유한성과 공허한 내면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투박한 막대기 같은 그의 인물상들은 당시 혼돈의 시대를 맞은 유럽에서 꽃피기 시작한 실존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삶의 허망함에 대해 통찰한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의 만남, 2차 세계대전 등은 그의 작품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자코메티가 만들어낸 인간의 형상은 작고, 심플하며 앙상한 느낌이다. 조각상이 너무나 작아진 나머지 받침대 위에 세우기도 어려웠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자코메티 파리 재단 제공
자코메티 파리 재단 제공

그 앙상하게 마른 조각들을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주워 왔던 수석들을 떠올렸다.

수석들의 빛깔은 검고 단순했다. 알록달록하거나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엄마는 이게 무슨 무슨 형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돌 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느릿한 걸음으로 작품들을 눈 속에 고이 담는 엄마를 보며 나는 30년 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돌 하나에서도 아름다움을 읽을 줄 알던 젊은 ‘여인’의 모습을 다시금 보았다.

“덕분에 좋은 구경 잘 했다.”

엄마는 오랜만의 외출이 다소 힘겨웠는지 아픈 다리를 끌고 천천히 지하철로 향하셨다.

강하고 의욕에 넘치던 어머니도 연약한 사람임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한 딸은, 늦기 전에 엄마에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작은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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