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은 삶” 유진 초이는 실존 인물이었다

2018-10-0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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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황기환, 일제강점기 도미해 미군으로 1차대전 참전
유진 초이와 비슷한 삶을 살다 간 독립운동가 황기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왼쪽이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 초이. / tvN 제공-연합뉴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왼쪽이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 초이. / tvN 제공-연합뉴스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 N 방영)의 주인공 유진 초이(Eugene Choi·이병헌 분)는 조선말 극심한 시대적 혼돈 속에 가난과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장교가 된다.

미·스페인 전쟁에서 공을 세운 유진은 미국 공사관의 영사대리로 조선으로 금의환향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양반댁 규수 고애신(김태리 분)과 사랑에 빠진다.

고애신을 비롯한 인물들과 함께 의병들을 돕던 유진은 결국 일제와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다.

유진은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 간 독립운동가를 실제 역사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군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인사 황기환도 그중 한 명이다.

평남 순천 출생인 황기환은 10대 후반이던 1904년 미국으로 갔다. 미국 땅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던 그는 1917년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동시에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유럽 전선에 투입된 황기환은 중상자 구호를 주로 담당했는데, 언제나 '정의와 사랑'을 신조로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이 당시 국내 신문에도 다뤄졌다.

그가 전장에 있던 1918년 5월에는 누구든지 전쟁 때 군 복무를 하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개정 징집법이 공포됐지만, 황기환이 이 법의 혜택을 받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끝났지만 2년간 유럽 전선을 누비던 황기환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김규식(훗날 임시정부 부주석 역임)의 제안으로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다.

승전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종전 후 국제정세 논의의 중심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곳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 강대국들을 상대로 대한독립의 당위를 알리는 일을 시작했고 황기환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아 활동한다.

독립운동가 황기환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연합뉴스
독립운동가 황기환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연합뉴스

애국심이 투철한 데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미군 복무라는 희귀 경력까지 갖췄던 황기환은 이후 프랑스·영국·미국 등 1차대전 승전국들을 누비며 활약한다.

최근 재불 한국사학자 이장규 씨(파리 7대 박사과정)가 프랑스 국립자료관을 이 잡듯이 뒤져 찾아낸 자료에서 황기환의 활약은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그는 당시 파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베트남의 독립투사 호찌민(훗날 베트남 국가주석)과 함께 1920년 1월 열린 프랑스 지리학회에 참석해 어눌한 프랑스어로 "우리는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황기환이 발언한 지리학회 분과 제목은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

당시 김규식, 황기환, 조소앙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파리에서 교류했던 호찌민은 그러나 황기환과 달리 연설 기회도 얻지 못했다. 당시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은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프랑스 경찰관이 보고서로 자세히 남겨놓아 한국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경찰관은 한 문건에서 "한국인 황씨(황기환)가 호찌민과 친밀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대화했다"고 적기도 했다.

이런 황기환이 프랑스에서 이룬 더 큰 업적은 따로 있다.

100년 전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영국까지 흘러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뻔한 것을 영국 정부를 설득해 프랑스로 이주시킨 주역이 바로 그였다.

먹고 살기 위해, 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해 고향을 등진 한인들은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북해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1차대전이 끝나고 1919년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에든버러까지 흘러들어 간다.

영국 정부는 당시 동맹국(영일동맹) 일본의 요구로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소식을 들은 황기환은 영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미군 복무 경력과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영국 정부에 항의, 한인 일부를 프랑스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한인들은 1차대전의 최대 격전지 베르덩(Verdun)이 있는 프랑스 마른(Marne) 지방의 벌판에서 시신과 유골을 수습하고 전사자 묘지를 조성하는 험한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한인들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는 고된 삶을 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고, 독립운동에 쓰라면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돈까지 모아 보냈다.

재불 한인동포 1세대인 이들은 3·1 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에는 소도시 쉬프(Suippes)에 모여 만세삼창을 하면서 1년 전 조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독립 의지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1920년 프랑스 한인들의 3·1 운동 1주년 기념식 / 나기호의 회고록 '비바람이 몰아쳐도'(1982·양서각) 수록 사진-연합뉴스
1920년 프랑스 한인들의 3·1 운동 1주년 기념식 / 나기호의 회고록 '비바람이 몰아쳐도'(1982·양서각) 수록 사진-연합뉴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미 사라진 나라였지만, 재불 한인 노동자 37명의 국적은 이 지방의 프랑스 지방정부 외국인등록부에 한국인(Coreen)이라고 기록됐다.

국적이 한국인으로 명기된 것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끈질긴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이 자료를 올해 초 처음 발굴한 재불 사학자 이장규 씨의 추정이다.

황기환은 또 영국에서 활동하면서는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회에 등장한 실존인물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등 친한파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알렸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매켄지는 의병 활동, 3·1운동, 일제의 제암리 학살 등을 꾸준히 취재했고 1920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까지 썼다.

황기환은 이후 유럽을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23년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뉴욕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미국 뉴욕 퀸스의 한 공동묘지에 있는 황기환의 묘 / 연합뉴스
미국 뉴욕 퀸스의 한 공동묘지에 있는 황기환의 묘 / 연합뉴스

그의 묘지는 사후 80년이 넘은 2008년에야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 등 동포들에 의해 퀸스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됐지만, 유해의 국내 송환은 여전히 난망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황기환과 같은 인물이 존재했기에 드라마 속의 유진 초이는 결코 허구의 인물로만 머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세계에 알린 매켄지 기자의 '후예'라 할 수 있는 학자들도 있다.

파리 7대학 한국학과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 로랑 키스핏 박사 등 프랑스의 한국학자들은 국민대 장석흥 교수의 도움으로 학회 '리베르타스'(라틴어로 자유라는 의미)를 파리에서 결성해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의 삶과 활약상이 기록된 귀중한 사료를 먼지 가득한 이역만리의 문서고에서 찾아내 연구하고 또 의미를 부여하는 학자들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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