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히 불법인데…2년 전부터 기를 쓰고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는 미국 문화

2025-04-0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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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부터 국내 일부 카페나 식당에 등장한 팁(Tip) 박스

최근 한국 사회에 새로운 소비문화 논란이 번지고 있다. 바로 미국에서 유입된 팁 문화다.

테이블에 놓인 팁을 가져가는 종업원 / New Africa-shutterstock.com
테이블에 놓인 팁을 가져가는 종업원 / New Africa-shutterstock.com

팁 문화가 일부 업장과 기업을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소비자들 사이에서 불편함과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팁 문화는 오랜 세월 미국을 중심으로 정착된 서비스 보상의 한 방식으로, 고객이 자발적으로 좋은 서비스에 대해 소액을 지급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를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제도적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2023년 팁 문화를 도입해 논란에 휩싸였던 매장에 놓인 팁 안내문, 팁 박스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2023년 팁 문화를 도입해 논란에 휩싸였던 매장에 놓인 팁 안내문, 팁 박스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한국에서 팁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23년 이후다. 특히 서울의 한 베이커리 카페가 영어로 된 안내문과 함께 카운터에 팁 박스를 설치하면서 이슈가 됐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면 팁을 주세요’(Tips : if you liked)라는 문구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일부 외국인을 겨냥한 마케팅이라는 해명이 뒤따랐지만 소비자 사이에서는 ‘돈을 더 내야 좋은 서비스를 받는다는 뜻인가’라는 반응이 퍼지며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배달앱 일부 매장이 메뉴 선택 사항에 추가한 팁 문항 / 온라인 커뮤니티
배달앱 일부 매장이 메뉴 선택 사항에 추가한 팁 문항 / 온라인 커뮤니티

팁 문화의 도입은 카페뿐 아니라 배달, 택시 업계 등으로도 확산하는 분위기다. 2023년 카카오모빌리티는 자사의 호출 서비스인 카카오 T에 ‘감사 팁’ 기능을 도입했다. 이용자들은 택시 호출 후 기사에게 1000~2000원의 팁을 선택적으로 줄 수 있도록 설정됐고 팁을 준 이용자는 더 높은 평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알려졌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이와 관련해 "승객의 자율적인 선택 사항"이라며 "회사가 가져가는 수수료도 없다"라고 밝혔으나 소비자들은 “이미 요금이 비싼데 추가로 팁까지 요구하는 건 과하다”, “강제성이 없다고 해도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배달 플랫폼 일부에서도 라이더에게 팁을 추가로 줄 수 있는 기능이 도입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했다.

한국인의 팁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2023년 'SK커뮤니케이션즈'가 성인 남녀 1만 21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려 73%가 한국 사회에 팁 문화가 도입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반대 이유로는 ‘기존 가격에 서비스 요금이 포함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팁을 줘야 한다는 압박이 싫다’, ‘외국 문화를 억지로 도입하는 느낌’이라는 의견이 뒤를 이었다.

해외 매장에 있는 한 팁 박스에 'Feed us'(먹이를 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 Toshiko Toshiko-shutterstock.com
해외 매장에 있는 한 팁 박스에 'Feed us'(먹이를 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 Toshiko Toshiko-shutterstock.com

팁 문화의 기원을 살펴보면 이는 17세기 유럽 귀족 사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귀족들은 하인이나 종업원에게 감사의 뜻으로 금전적 보상을 했고 이 관습이 19세기 후반 미국 상류층에게 전파됐다. 미국 상류층은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이러한 문화를 세련된 관습으로 인식하며 미국 내 고급 호텔이나 식당 등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팁은 단순한 감사 표현을 넘어 서비스의 질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 팁 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노동시장 구조와 인종차별의 역사도 크게 작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흑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호텔 포터, 식당 종업원 등 저임금 서비스업에 종사해야 했다. 고용주들은 이들에게 정규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받은 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게 했다. 이는 고용주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는 수단으로 정착됐고 이후 이를 제도적으로 공고히 한 것이 바로 ‘팁 크레딧(Tip Credit)’ 제도다.

미국의 팁 크레딧 제도는 고용주가 팁을 받는 직원을 대상으로 연방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연방 기준으로 팁을 받는 종업원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2.13달러에 불과하다. 고용주는 팁을 통해 이 금액과 일반 최저임금(7.25달러)의 차액이 채워질 것이라 가정하며 급여를 책정한다. 이 구조는 고용주에게는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이지만 종업원 입장에서는 수입이 손님의 팁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구조적 불안정성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로 인해 일부 종업원은 팁을 받기 위해 과도하게 친절하거나 감정노동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손님에게 태블릿PC로 팁을 요구하는 종업원 / bigshot01-shutterstock.com
손님에게 태블릿PC로 팁을 요구하는 종업원 / bigshot01-shutterstock.com

이러한 제도는 최근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2%는 팁을 요구하는 업장이 과거보다 확연히 늘었다고 응답했다. 또 전체 응답자의 40%는 최근 결제 시스템에서 정해진 비율의 팁을 요구받는 것이 불쾌하다고 밝혔다. 특히 무인 키오스크에서 음료나 디저트를 구매하는데도 팁 옵션이 등장하는 상황은 많은 소비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팁에 대한 피로감은 미국 내에서도 팽배한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이러한 팁 문화가 정착하기 어려운 제도적 기반을 갖고 있다. 현행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제21조에 따르면 식품접객업소는 가격표에 적힌 요금 이외의 추가 금액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이 금지돼 있다. 즉 음식값 외에 팁을 요구하거나 고정적으로 받는 행위는 명백히 위법 소지가 있다. 특히 이러한 팁 요구 행위가 강제성을 띤다면 불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은 소비자가 사전에 인지한 가격만큼의 금액만 지불해야 한다는 소비자 보호 원칙을 담고 있다.

또한 한국은 현재 가격표시제에 따라 소비자들에게 가격 정보를 명확히 표시하게 돼 있다. 가격표시제는 시장에서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장치다. 만약 팁 문화를 도입한다면 모든 가격이 유동 가격처럼 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팁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회적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법적 기준의 개정이 수반돼야 한다.

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이미지
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이미지

결국 팁 문화는 단순히 돈을 더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서비스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각 나라의 역사, 제도, 문화와 맞물려 정착할 수밖에 없다. 미국처럼 팁을 통해 저임금 노동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에서는 문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한국처럼 법으로 소비자 보호가 강하게 규정된 나라에서는 이를 억지로 도입하려 할 경우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고물가 행진으로 이미 시름을 앓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팁 문화는 형식상 자율이라고 하더라도 강제성을 띤 요구로 다가올 수 있어 전문가들도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home 한소원 기자 qllk338r@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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