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죽이러 왔수다” 대한민국 경악하게 했던 김신조 별세

2025-04-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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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청와대 습격 사건 주역... 무장공비로 와서 목회자로 떠나

무장공비로 남한에 왔다가 목회자로 떠난 김신조 목사. / 연합뉴스
무장공비로 남한에 왔다가 목회자로 떠난 김신조 목사. / 연합뉴스

북한 무장공비로 우리나라에 침투했다가 귀순한 뒤 목회생활을 했던 김신조 목사가 9일 새벽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서울성락교회에 따르면 김 목사는 이날 새벽 소천했으며,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된다.

김 목사는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 중 유일하게 생포돼 귀순한 인물이다.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김 목사는 1942년 6월 2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순천으로 이사했으며, 만 5세에 평양으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만 19세에 조선인민군 지상군에 입대했으며, 이후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인 124부대에 배속됐다. 김 목사는 과거 북한에서 6·25 전쟁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으로 배웠으며, 특히 전쟁 당시 폭격 경험을 계기로 군에 지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24부대는 남한 정부 요인 암살과 게릴라 작전을 목표로 훈련받은 최정예 부대다. 김신조는 이곳에 선발돼 1968년 청와대 습격 임무에 투입됐다.

1968년 1월 21일 오후 10시쯤 김 목사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은 북악산을 넘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다. 이들의 목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이었다. 김 목사는 교도소 공격조에 속해 있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군과 경찰의 합동 추격 작전으로 28명이 사살됐고, 2명은 북으로 도주했으며, 김 목사만이 생포됐다.

당시 그는 검문을 피해 독립가옥에 숨어 무기와 장비를 드보크에 묻고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들고 있었다. 침투 다음날 오전 2시 25분 제30사단 92연대 소속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아래 세검정 계곡에서 그를 발견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군이 “나오면 살려준다”고 회유하자 김 목사는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투항했다. 오전 4시 15분경 방첩대에 인계된 김 목사는 무기 소재를 묻는 질문에 직접 안내해 비봉 승가사 옆 200m 지점에서 장비 일부를 회수하게 했다. 이후에도 그는 공비 소탕에 적극 협조하며 정보를 제공했다.

생포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 목사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발언으로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말은 수갑을 찬 채 아무 준비 없이 의자에 앉혀진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방첩대에서 폭행당해 얼굴이 부은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MBN 예능 ‘고수의 비법 황금알’에서 김 목사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가뜩이나 생포돼 화가 나 있었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도 없이 끌려가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돼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심지어 정치에 관여하지 않던 박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방첩부대에 항의할 정도였다. 김 목사가 투항해 귀순했다는 소식이 북한에 전해지자 그의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갔고, 일부는 사형당했다는 소문이 귀순자들 사이에 돌았다.

김 목사는 전향 후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지냈다. 군에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이후 결혼해 서울 동작구 흑석동 시범아파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중앙정보부의 감시는 계속됐지만, 김 목사는 1970년대 중순 사당동으로 이사해 아내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1996년에는 서울침례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서울성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은퇴했지만 공식 직함은 없어도 ‘원로목사’로 불리며 3부 예배에 꾸준히 출석했다. 2010년에는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북한인권위원회 고문으로 임명돼 안보 강연 등 사회활동도 이어갔다.

김 목사는 민간인 살상에 연루된 살인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투항과 자수를 선택했으며 직접 살해한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드보크에 숨긴 총과 탄창에 탄약이 가득 차 있었고 화약 흔적도 없어 발포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 증거가 재판에서 인정돼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고 정부는 일자리를 주선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2~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둔 뒤 종교인으로 삶을 이어가며 안보 강연과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김 목사는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다. 2012년 1월 21일 채널A 뉴스, 2015년 1월 21일 ‘정용관의 시사병법’, 2020년 9월 24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1·21 사태를 증언했다. 2020년 방송에선 이념과 사상을 떠나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21년 10월 31일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했고, 2022년 6월 7일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김 목사 삶에는 흥미로운 일화도 전해진다. 술집에서 오줌을 누던 중 한 청년에게 뒤통수를 맞고 “너 때문에 군대 생활이 고달팠다”는 욕설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1 사태로 군 복무기간이 연장돼 당시 청년들의 분노가 컸던 탓이다. 김 목사는 사과했다고 한다. 탈북자 김만철을 설득하기 위해 정부가 김 목사를 보냈을 때 같은 동네 출신임을 강조하며 “만철이 형, 나 신조요”라고 설득한 일화도 갖고 있다.

김 목사는 대중매체에서도 조명됐다.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 성동일, 2003년 영화 ‘실미도’에서 신덕호, 2005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백동현이 그를 연기했다. 웹툰 ‘70’에서는 특수부대원이 “김신조보다 빠를까요?”라는 대사를 남겼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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